성후설(成後卨)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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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성후설 |
한글표제 | 성후설 |
한자표제 | 成後卨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조~현종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자허(子許)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15년(광해군7) |
사망 | 1673년(현종14) |
본관 | 창녕(昌寧)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이천(利川) 사관산(史官山) |
증조부 | 성효관(成孝寬) |
조부 | 성이문(成以文) |
부 | 성신구(成信耈) |
모_외조 | 문화유씨(文化柳氏): 유곤수(柳崑壽)의 딸 |
형제 | 성후주(成後周) |
처_장인 |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상검(李尙儉)의 딸 →(자녀)1녀 |
자녀 | (양자)성숙(成璹) (1녀)정중기(鄭重基)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성후설(成後卨) |
총론
[1615년(광해군7)∼1673년(현종14) = 59세]. 조선 중기 인조~현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자허(子許)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현령(縣令)성신구(成信耈)이고, 어머니 문화유씨(文化柳氏)는 처사(處士)유곤수(柳崑壽)의 딸이다. 대사간(大司諫)성이문(成以文)의 손자이고, 전부(典簿)성후주(成後周)의 형이다.
효종 시대 활동
1642년(인조20) 사마시에 합격하고, 1651년(효종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假注書)로 보임되었는데, 효종이 그 용모가 단정하고 기주(記注)하는 데에 민첩함을 보고 그를 매우 아꼈다. 이어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고, 예조 낭청(郎廳)으로 옮겼으며 함경도도사(咸慶道都事)로 나갔다가, 병조 좌랑을 거쳐, 1655년(효종6)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고, 다시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로 나갔다. 1656년(효종7) 성균관 사예(司藝)로 승진되었고,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가서 3년 동안 있었는데, 이때 묵은 병폐를 척결하고 관의 지출을 절약하니, 치적이 제일이었다. 관찰사가 이를 보고하니, 효종이 말을 상으로 내려주고, 조정으로 불러서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하였다. 이때 전지(田地)를 매매할 때, 노비(奴婢)의 경우처럼, 반드시 관서(官署)를 경유하도록 건의하였는데, 이것은 나라의 법규로 정해졌다. 안동부사(安東府使)에 임명되어 5년 동안 있었는데, 기근이 들자 구황(救荒)하는 데에 정성을 기울여 목숨을 구한 자가 많았다.
현종 시대 활동
1659년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자,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어, 춘추관 사관(史官)을 겸임하여 『효종실록(孝宗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1660년(현종1)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갔는데, 1662년(현종3) 양남 어사(兩南御史)남구만(南九萬)이 그의 치적이 훌륭하다고 보고하여, 현종이 그에게 표리(表裏) 1벌을 하사하였다. 1665년(현종6) 사헌부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가, 예빈시(禮賓寺) 정(正)을 거쳐, 영광군수(靈光郡守)로 나갔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66년(현종7)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사간원 사간 · 사헌부 집의(執義)를 역임하였고, 강계부사(江界府使)로 나갔다가 곧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옮겼다. 의주에 부임해서는 압록강을 따라 수졸(戍卒)을 배치하여 순찰하고 불법 잠상(潛商)을 단속하니 변경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또 상세(商稅)를 공평하게 부과하여 부고(府庫)를 충실하게 하였다. 1669년(현종10)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승정원에 들어가서 우승지(右承旨)로 승진하였고, 예조 · 형조의 참의를 거쳐, 1671년(현종12) 수원부사(水原府使)로 나갔다. 부병(府兵)의 정원이 너무 많았으므로 노약자를 가려내고 정예병만을 선발하여, 수원부의 병력을 충실하게 만들었다. 1673년(현종14)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어 집으로 돌아왔는데, 오랜 숙질로 인하여 그해 10월 29일 죽으니, 향년 59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후설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려서부터 정직하고 성실하였으며, 농담을 좋아하지 않았다. 성품은 화락하고 단아하였으며 행동은 점잖았다. 그는 언사(言辭)가 맑고 조급함이나 구김살이 없어 사람들이 단정하고 장중한 선비라고 여겼다. 그는 항상 자제에게 경계하기를, “우리 선조들이 관직을 이어오면서 대대로 청렴과 검약을 전수해 주었다. 너희들도 이것을 잘 지켜서 조상에게 욕이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이천(利川) 사관산(史官山)에 있으며, 임상원(任相元)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염헌집(恬軒集)』 권33)이 남아 있다.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이상검(李尙儉)의 딸인데, 아들이 없고 딸 하나를 두었다. 형의 아들 성숙(成璹)을 양자로 삼았는데, 그는 부사(府使)를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염헌집(恬軒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학봉전집(鶴峯全集)』
- 『성근보집(成謹甫集)』
- 『외재집(畏齋集)』
- 『월주집(月洲集)』
- 『금곡집(錦谷集)』
- 『계서일고(溪西逸稿)』
- 『야곡집(冶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