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南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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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 중반 이후 한양 남촌을 기반으로 김상로와 김귀주가 이끌던 노론 당파.

개설

영조대 중반 이후 노론 내에서 분화한 남당(南黨)은 김상로(金尙魯)와 김귀주(金龜柱)를 영수로 하여, 당시 북당이 주도하던 탕평을 비판하며 노론의 일진일퇴론(一進一退論)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노론이 영조를 옹호하다 화를 당한 신임옥사(辛壬獄事)의 의리에 철저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사도세자를 비판하는 데 앞장서서 결국 임오화변을 이끌어 내었다. 그 후에는 청론(淸論)을 자임하며 홍봉한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는 등 북당과 맞섰다. 정조대에는 벽파(僻派)로 계승되었다. 김상로와 김귀주를 추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남촌(南村) 거주자가 많았기 때문에 남당이라 불린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남당은 영조대 중반 한양의 남쪽 특히 남산 주변에 거주하던 노론 가운데 비(非) 벌열 세력을 기반으로 하며 김상로를 영수로 하는 당이다. 이들은 노론 북당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소외된 빈한한 가문이거나 지방의 신흥 세력이 많았기 때문에 준절한 청론(淸論)을 표방하였다. 이들은 노론의 신임옥사에 대한 의리론을 철저히 관철시키고 노론이 전면에 나서서 소론·남인에게 확실한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국정 운영이 진정한 탕평이라고 생각하였다.

반면 이 시기 탕평을 담당하고 있던 동당은 노론의 신임옥사에 대한 의리를 부정하지 않는 소론·남인도 등용한다는 노선이었다. 이러한 노선의 차이는 숙종대 후반 화당(花黨)낙당(駱黨)의 갈등까지 소급되는 연원이 있었다(『영조실록』 1년 6월 1일). 이들은 북당과 동당이 주도하는 탕평에 비판적인 노론 관료 그룹이었지만, 영조가 정순왕후와 혼인한 이후에 김한구(金漢耈)·김귀주 등 호론(湖論) 학맥을 기반으로 하는 척신까지 가세하자 그 세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남당은 사도세자가 신임옥사에 대한 의리에 철저하지 못하며 을해옥사(乙亥獄事) 전후로 부왕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이들은 세자가 여러 과오나 비행을 저지르고 있는데도 홍봉한의 북당이 제대로 이끌어 주지 못한 채 보호를 명목으로 세자의 실덕(失德)을 방조한다고 보았다.

남당이 주도한 세자 비판은 종묘와 사직을 위하여 세자를 폐위하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하였다. 임오화변의 원인이야 복합적이지만, 그 귀결은 남당의 반(反) 세자 노선이 현실화한 것이었다(『정조실록』 즉위년 3월 30일). 이후에도 남당은 후일 정조가 되는 세손 보호를 내세우던 북당의 홍봉한과 홍인한을 제거하기 위하여 집요한 시도를 하였다. 이들은 세손의 외가인 북당이 도리어 세손에게 불리하고, 정순왕후 일가의 후원을 받으며 노론 청론을 대표하는 남당이 세손을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남당의 주장대로 세손은 정순왕후 측의 후원과 노론 청론의 지원을 받아 즉위하였고, 즉위 후에 정조는 『명의록(明義錄)』에서 이들의 기여를 공인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우현좌척(右賢左戚), 즉 사림을 등용하고 척속(戚屬)을 배제한다는 논리에 투철하였기에, 남당의 유력 척신인 김귀주를 철저히 배제하였다. 정조가 북당의 홍인한을 배제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이후 남당 가운데 김귀주 세력은 김귀주가 배제되는 것에 불만을 품어서, 『명의록』마저 믿을 수 없는 거짓 기록이라고 주장하다가 단죄되기도 하였다(『정조실록』 2년 7월 18일).

변천

김귀주계 이외에 노론 청론에 기반을 둔 남당 역시 정조대 초반 궁료 출신 홍국영과 소론 서명선에게 밀려 정국을 주도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서명선이 주도하는 시파(時派)에 대항하는 벽파(僻派)로 결집한다. 이는 일진일퇴보다는 의리탕평을 추구한 정조의 뜻이 작용한 것이다.

참고문헌

  • 『홍익정유사(洪翼靖遺事)』
  • 김성윤, 『조선 후기 탕평 정치 연구』, 지식산업사, 1997.
  • 박광용, 「조선 후기 「탕평」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 최성환, 「정조대 탕평 정국의 군신 의리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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