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벽(西壁)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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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서벽 |
한글표제 | 서벽 |
한자표제 | 西壁 |
상위어 | 승정원(承政院), 의정부(議政府), 좌차(座次), 홍문관(弘文館) |
관련어 | 남상(南床), 동벽(東壁), 북벽(北壁), 주벽(主壁) |
분야 | 용어해설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이근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서벽(西壁)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중종실록』 11년 3월 30일, 『중종실록』 11년 1월 3일, 『성종실록』 4년 12월 1일, 『태종실록』 8년 2월 25일, 『태종실록』 17년 6월 9일, 『세종실록』 11년 3월 23일, 『정조실록』 20년 4월 4일, 『세종실록』 17년 4월 27일, 『세종실록』 29년 9월 12일 |
조선시대 관청에서 관원들이 합좌(合坐)할 때 서쪽에 자리하는 관원.
개설
조선시대 의정부를 비롯해 홍문관·승정원 소속의 관원들은 함께 자리할 때 서열에 따라 앉는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서벽이란 서쪽에 앉아 동쪽을 향하는 자리로, 의정부의 정2품인 좌·우참찬과 홍문관의 정5품인 교리부터 종6품인 부수찬까지, 승정원은 좌부승지와 우부승지가 이에 해당한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관원들이 합좌할 때 관청별로 앉는 차례인 좌차(座次)가 규정되어 있었다. 관청 내 서열에 따라 장관에 해당되는 관원이 북벽(北壁)에 자리하고 그다음 직군이 동벽과 서벽 순서로 자리하며, 그다음 하위직은 남쪽의 승상(繩床)에 앉는데 이들은 남상(南床)이라 하였다. 북벽은 주벽(主壁)이라고도 하였다.
관원의 좌차 구별은 조선조의 많은 관청 가운데 특히 의정부나 승정원·홍문관 등에서 확인되며, 관청별 서벽은 의정부의 경우 정2품 관직인 좌참찬과 우참찬이(『중종실록』 11년 3월 30일), 홍문관은 정5품 교리에서 종6품 부수찬까지, 승정원은 좌부승지와 우부승지가 이에 해당하였다. 이 밖에도 경연 때에 지경연(知經筵)·동지경연(同知經筵)·특진관(特進官) 등이 서벽에 자리하였다(『중종실록』 11년 1월 3일). 이 중 의정부의 서벽은 동벽과 함께 왕이나 왕대비 등에게 올리는 존호(尊號)를 비롯해 왕세자의 자(字), 국상 때의 복제(服制), 배향공신(配享功臣) 등을 의정하는 논의에 참석하였다.
이 같은 좌차는 단순히 합좌할 때 앉는 자리를 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복무규정이나 관원의 인사에도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승정원의 복무규정 가운데 휴가와 관련되어, 정식 휴가인 식가(式暇)의 경우 동벽은 부모·조부모·증조부모·백숙부모·친형제·외조부모·처부모·망처(亡妻)의 기신제를 지낸 뒤 2일간 휴가가 받은 반면 서벽은 부모·조부모·증조부모의 기신제를 지낸 후 바로 출사(出仕)하도록 하였다. 또한 인사이동에서도 승정원의 동벽인 우승지 이상은 2품으로 올려 이동하고, 좌부승지 이하 서벽은 육조(六曹)의 참의에 제수하였다(『성종실록』 4년 12월 1일).
변천
관원들의 좌차에 대한 논의는 이미 조선초부터 있어, 1408년(태종 8) 2월 예조(禮曹)에서는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비롯한 무관직의 좌차를 왕에게 보고한 바 있다. 이때 서벽은 각 군(軍)의 총제(摠制)·동지총제(同知摠制) 및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상의 겸상호군(兼上護軍)·절제사(節制使)로 규정되었다(『태종실록』 8년 2월 25일).
한편 1417년 6월부터는 의금부에서 중대한 사건을 심문할 때 만약 대언(代言) 즉 후일의 승지(承旨)가 왕명을 받들어 의금부에 가면, 의금부의 제조나 형조 관원, 대간 등은 모두 서벽에 앉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7년 6월 9일). 이는 대언이 왕명을 받들고 나왔기에 왕명을 존숭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조치였다.
이 밖에도 1429년(세종 11) 3월에는 문·무과 회시(會試) 때 시관(試官)의 좌차를 정하였는데, 종1품과 정2품은 북벽에, 종2품과 참의는 서벽에,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이하 6품 관원은 남쪽에 자리하도록 하였다. 만약 정1품의 시관이 있다면 정1품은 북벽에, 종1품과 정2품은 동벽에, 종2품은 서벽에, 참의와 이하 관원들은 남쪽에 두 줄로 자리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1년 3월 23일).
조선후기 1796년(정조 20)에는 의정부에서 청백리를 선발할 때 여러 관원들이 추천한 대상자를 의정부에서 모아 의정부의 서벽과 이조(吏曹)·예조의 당상관들이 회의하여 취사선택하게 하였다(『정조실록』 20년 4월 4일).
한편 통상적인 관원들의 좌차 구분 이외에도 중국이나 여진족 사신의 접대, 그리고 세자의 대리청정 혹은 입학의(入學儀)를 비롯해 위계가 다른 몇몇 관청의 관원이 모일 때도 좌차가 거론되었다. 1435년(세종 17) 왕을 대신해 진양대군(晉陽大君) 즉 후일의 세조를 보내 명나라에서 온 사신을 접대한 적이 있는데, 이때 사신은 동벽에, 대군은 서벽에 앉아 잔치를 베풀었다(『세종실록』 17년 4월 27일). 교린국이던 일본 등지에서 온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 때에는 조선 측의 판서나 잔치를 주관하는 관원은 동벽에, 일본 등지에서 온 사신은 서벽에 자리하도록 규정하였다[『세종실록』 오례 빈례 의식 예조 연인국사의]. 또한 1447년 대리청정을 하던 세자가 승화당(承華堂)에 나와서 정사를 살필 때, 세자는 동벽에 앉고 신하들은 서벽에 차례대로 앉게 하였다(『세종실록』 29년 9월 12일).
참고문헌
- 『육전조례(六典條例)』
- 『은대조례(銀臺條例)』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