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향공신(配享功臣)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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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배향공신 |
한글표제 | 배향공신 |
한자표제 | 配享功臣 |
상위어 | 공신(功臣) |
하위어 | 종묘배향공신(宗廟配享功臣), 문묘배향공신(文廟配享功臣), 묘정배향공신(廟庭配享功臣), 정향(庭享) |
관련어 | 훈봉공신(勳封功臣), 정훈공신(正勳功臣), 원종공신(原從功臣) |
분야 | 정치/인사/녹훈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 조선 |
집필자 | 신명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배향공신(配享功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중종실록』 12년 9월 17일 |
고려·조선시대의 종묘와 문묘에 배향된 공신.
개설
종묘와 문묘(文廟)에 공신을 배향하는 제도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조선시대에 더욱 발전되었다. 종묘에 배향된 공신이 종묘배향공신이고, 문묘에 배향된 공신이 문묘배향공신이었다. 종묘배향공신과 문묘배향공신은 당대의 정치와 유학을 대표하는 공신들이었다.
종묘에 공신을 배향하는 제도는 중국당나라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사에서는 고려성종대에 종묘를 오묘제(五廟制)로 정비하여 공신을 배향하면서부터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종묘에 모셔진 고려의 역대 왕들에게 공신이 배향되었다. 이 전통이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었는데, 다만 추존되거나 복위된 왕 또는 축출된 왕들에게는 공신이 배향되지 않았다. 예컨대 조선시대의 추존된 왕인 덕종(德宗)·원종(元宗)·진종(眞宗)·장조(莊祖)·문조(文祖, [翼宗])과 복위된 단종 등에게는 배향공신이 없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고종대에 장조와 문조에게 공신이 배향되었는데, 이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던 흥선대원군이 강행한 것이었다. 본래 종묘배향공신은 생전에 왕으로 군림하다가 사후에 종묘에 모셔지는 왕에게만 배향되는 공신이었다. 종묘배향공신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인 순종의 배향공신을 끝으로 사라졌다.
문묘에 공신을 배향하는 제도 역시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사에서는 고려시대 1020년(현종 11) 최치원이 문묘에 배향된 것이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022년(현종 13)에는 신라의 설총이 문묘에 배향되었다. 이 전통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이른바 동방 18현으로 불리는 18명이 문묘에 배향되었다.
내용 및 변천
종묘와 문묘는 근본적으로 유교문화의 산물이었다. 종묘배향공신제도와 문묘배향공신제도는 한국 사회가 유교화될수록 중요시되었다. 따라서 종묘배향공신제도와 문묘배향공신제도는 비록 고려시대에 시작되었지만 유교적 왕도정치가 추구된 조선시대에 최고 수준으로 정비되었다.
종묘배향공신은 조선시대 양반 관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양반 관료의 최대 이상인 왕도정치 구현에 기여하였다는 평가는 영예로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종묘배향공신을 배출한 가문은 최고의 가문으로 존중되었으며, 그 후손들은 국가로부터 각종 특혜를 받았다.
조선시대 종묘배향공신은 보통 왕의 삼년상이 끝나고 왕의 신주를 종묘에 봉안하기 보름 내지 한 달 전쯤 결정되었다. 배향 대상자는 선왕이 살아 있었을 때 보좌하다가 이미 세상을 떠난 관료들이었다. 만약 꼭 배향해야 할 사람인데도 선왕보다 오래 살 경우에는 사후에 논의하여 배향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효종과 함께 북벌을 상징하던 송시열의 경우, 효종보다 훨씬 오래 살다가 숙종대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따라 송시열은 숙종대부터 배향 논의가 시작되어 정조대에 효종의 배향공신으로 결정되었다.
조선초기에는 왕과 신하들이 함께 모여서 배향 대상자를 논의해서 뽑았는데, 조선후기에는 방법이 바뀌었다. 즉, 배향 후보자의 명단을 작성하고, 신하들은 자신이 선택한 사람의 이름 아래에 동그라미를 치게 하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하여 많은 동그라미를 많이 얻은 사람을 종묘배향공신으로 선정하였는데, 그 수는 적게는 1명부터 많게는 7명에 이르렀다.
종묘배향공신으로 결정되면 별도의 신주를 봉상시(奉常寺)에서 미리 제작하였다. 다만 신주에는 해당자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왕의 삼년상 이후 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시기가 가까워지면 봉상시는 미리 제작하였던 신주를 공신가의 사당에 보내 제사를 지냈다. 종묘배향공신의 신주를 모시고 공신가의 사당으로 갈 때는 의장을 갖추었다. 신주는 어깨에 메는 가마에 실어 갔는데, 왕의 교서(敎書), 제사에 쓸 제문 등이 행렬에 포함되었다. 공신가의 사당에 도착하면 먼저 왕의 교서를 읽었다. 교서는 배향공신으로 선정된 사실 및 그의 공덕을 찬양하는 내용으로서 예문관에서 작성하였다. 교서를 읽은 후에 가지고 온 신주에 직함과 성명을 썼다. 이어서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제문을 읽은 후 직함과 성명을 쓴 배향신주를 모시고 돌아갔다. 배향신주는 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날까지 궁궐 안의 적당한 곳에 모셔 두었다가 왕의 신주가 종묘에 들어가는 날 배향신주를 종묘의 공신당(功臣堂)에 모셨다. 종묘배향공신은 자신이 보좌한 왕의 신주가 종묘에서 나갈 때 같이 나가야 하는 운명이었다. 왕의 신주는 영녕전으로 갔지만, 배향공신의 신주는 후손에게 주어져 불태우도록 하였다. 다만 종묘에 모셔진 왕이 불후의 공덕이 있는 불천위(不遷位)가 되면 배향공신의 신주 역시 옮기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고려시대의 종묘에 배향된 공신은 태조실에 배현경·홍유·복지겸·신숭겸·유금필·최응, 혜종실에 박술희·김견술, 정종실에 왕식렴, 광종실에 유신성·서필, 경종실에 박양유·최지몽, 성종실에 최량·최승로·이몽유·서희·이지백, 목종실에 한언공·최숙·김승조, 현종실에 강감찬·최항·최사위·왕가도, 덕종실에 유소, 정종실에 서눌·황주량·최충·김원충, 문종실에 최제안·이자연·왕총지·최유선, 순종실에 이정공, 선종실에 문정·유공·김상기, 숙종실에 소태보·왕국모·최사취·유인저, 예종실에 윤관·김인존·위계정, 인종실에 김부식·최사전, 의종실에 최윤의·유필·문공원, 명종실에 윤인첨·문극겸, 신종실에 조영인, 희종실에 최선·임유, 강종실에 정극온, 고종실에 조충·이항·김취려, 원종실에 이세재·채정, 충렬왕실에 허공·설공검, 충선왕실에 홍자번·정가신, 충혜왕실에 한악·이규, 충정왕실에 이암·이인복, 공민왕실에 왕조·이제현·이공수·조익청·유숙 등 74명이었다.
조선시대의 종묘에 배향된 공신은 태조실에 조준·이화·남재·이제·이지란·남은·조인옥, 정종실에 이방의, 태종실에 하륜·조영무·정탁·이천우·이래, 세종실에 황희·최윤덕·허조・신개·이제·이보, 문종실에 하연, 세조실에 권람·한확·한명회, 예종실에 박원형, 성종실에 신숙주·정창손·홍응, 중종실에 박원종·성희안·유순정·정광필, 인종실에 홍언필·김안국, 명종실에 심연원·이언적, 선조실에 이준경·이황·이이, 인조실에 이원익·신흠·김류·이귀·신경진·이서·이보, 효종실에 김상헌·김집·송시열·이준·민정중·민유중, 현종실에 정태화·김좌명·김수항·김만기, 숙종실에 남구만·박세채·윤지완·최석정·김석주·김만중, 경종실에 이수·민진후, 영조실에 김창집·최규서·민진원·조문명·김재로, 장조실에 이종성·민백상, 정조실에 김종수·유언호·김조순, 순조실에 이시수·김재찬·김이교·조득영·이구·조만영, 익종실에 남공철·김로·조병구, 헌종실에 이상황·조인영, 철종실에 이헌구·이희·김수근, 고종실에 박규수·신응조·이돈우·민영환, 순종실에 송근수·김병시·이경직·서정순 등 95명이었다.
왕도정치를 추구한 조선시대의 양반 관료들은 기본적으로 유학을 신봉하던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중국 춘추시대에 공자가 집대성하고 남송대의 주희가 재정리한 유학, 즉 주자학을 종교적 정열로 신봉하였다. 조선시대의 양반 관료들은 주자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성균관과 향교를 세웠다. 성균관과 향교에서 공자를 모신 건물을 문묘(文廟)라고 하였는데, 이는 공자로 상징되는 유교가 중국 문화권에서 문(文)을 대표하였기 때문이었다.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에 배향된 유학자들이 이른바 문묘배향공신이었다. 조선시대 문묘배향공신을 배출한 가문은 최고의 유학자 가문으로 존경받았으며, 국가에서는 기회가 되는 대로 그 후손들을 특채하였다.
조선시대의 문묘는 공자를 모신 중앙의 대성전과 그 앞의 좌우에 세운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로 이루어졌다. 중앙의 대성전에는 공자를 위시하여 안자·증자·자사·맹자 등 대표적인 중국 유학자들을 모셨다. 동무와 서무에는 그 외의 중국 유학자들과 우리나라 출신 유학자들을 모셨다. 고려시대에 시작된 문묘배향공신의 지위와 영향력은 조선시대에 들어 획기적으로 높아졌다.
조선시대에 최초로 문묘에 배향된 공신은 정몽주였다. 조선개국 이후 정몽주·권근 등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요구가 줄기차게 있었지만, 결국은 정몽주가 1517년(중종 12) 9월 17일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정몽주의 신위는 문묘에서 최치원의 신위 다음에 자리하였다(『중종실록』 12년 9월 17일). 임진왜란 이후에는 당쟁이 격화되면서 문묘배향공신도 당쟁의 대상이 되어 당파가 바뀔 때 문묘배향공신까지 바뀌는 일도 있었다. 문묘배향공신은 학문적 업적을 정치적·군사적 업적 못지않게 중시한 조선시대 문치주의의 결과였다. 최종적으로 문묘에 배향된 설총·최치원·안향·정몽주·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 등 18명은 한국의 유학사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의의
종묘배향공신과 문묘배향공신은 고려·조선시대의 유교정치와 유학을 대표하는 공신들로서 학문과 문화를 중시한 전통시대 문치주의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춘관지(春官志)』
- 『춘관통고(春官通考)』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국조공신록(國朝功臣錄)』(장서각 도서 2-622)
- 신명호, 『조선의 공신들』, 가람기획, 2003.
- 정두희, 『조선초기 정치지배세력연구』, 일조각, 1983.
- 박천식, 「고려 배향공신의 제도적 성격과 그 특성」, 『전라문화논총』 3, 1989.
- 이현진, 「조선 숙종초 정국동향과 배향공신」, 『한국학보』 31-2,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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