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릉도(山陵圖)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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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산릉도 |
한글표제 | 산릉도 |
한자표제 | 山陵圖 |
동의어 | 산도(山圖), 산형도(山形圖) |
관련어 | 북도각릉전도형(北道各陵全圖形), 산릉도감(山陵都監), 상례(喪禮) |
분야 | 문화/예술/미술 |
유형 | 개념용어 |
집필자 | 정은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산릉도(山陵圖)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9년 4월 1일, 『세종실록』 24년 5월 21일, 『영조실록』 30년 8월 17일, 『태조실록』 1년 10월 28일 |
조선시대 왕릉이 위치한 곳의 산형과 주요 경물을 묘사한 특수 지도.
개설
산릉도(山陵圖)는 왕릉의 풍수를 알아보기 위해 그린 그림으로 산도(山圖) 혹은 산형도(山形圖)라고 불렸다. 국장이 나면 우선 능을 조성하기 위해 택지를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거론된 여러 곳의 산도가 그려졌으며, 이를 토대로 왕과 신하들이 의논을 한 후 최종적으로 왕이 능지(陵地)를 결정했다. 산릉도는 왕릉이 위치한 곳의 사산(四山)과 수계(水系), 화소의 경계를 표시하였다는 점에서 특수 지도라 할 수 있다. 또한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위해 왕실 직계 선조나 시조의 산릉도가 그려지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왕릉은 오례(五禮) 중 흉례(凶禮)에 의거하여 조성되었다. 왕이나 왕비가 승하하면 즉시 국장을 담당하기 위한 임시 기구인 국장도감(國葬都監)이 설치되었다. 국장은 보통 5개월이 걸렸으며 이 기간 동안 왕릉이 조성되는데, 가장 먼저 왕릉터를 결정하는 절차가 진행된다. 땅의 생김새를 보고 길흉을 판단하는 상지(相地)는 시신을 입관하는 절차인 대렴(大斂) 이후 대신들이 지관과 함께 한양 주변 백 리 안팎의 여러 곳을 돌아보고 후보지를 천거하였다. 천거된 후보지는 화원이 그림으로 그리고 지관이 산론(山論)을 써서 왕에게 바쳤으며, 조정에서 논의를 거친 후 최종적으로 왕이 능지를 결정하였다.
왕릉은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신성한 지역으로, 금표(禁表)를 세워 출입을 막았으며 그 둘레는 약 30~40리 즉, 12~16㎞ 정도 되었다. 따라서 산릉 근처에 있는 일반 분묘는 이장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9년 4월 1일). 왕릉의 화소(火巢) 주위에는 해자(垓字)를 파고, 화재가 났을 때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해자 밖의 풀과 나무를 불살라버렸다. 왕릉의 입구에는 능을 관리했던 관리들의 수직소이자 제사에 관계된 일체의 일을 주관했던 재실(齋室)을 두었으며, 이곳을 지나 진입하면 능 앞을 흐르는 도랑에 금천교를 놓았다. 그 건너에는 능실의 입구를 알리는 홍살문을 세웠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은 박석(薄石)을 깔아 만든 어도(御道)로 연결되어 있다. 어도 동쪽에 능의 주인인 왕 혹은 왕비의 능호(陵號)와 일생의 약력을 적은 비석을 모신 비각을 세웠으며, 서쪽에는 제사에 필요한 음식을 차리는 수라간과 능상(陵上)을 수호하는 수복의 직소인 수복방(守僕房)을 적당한 장소에 배치했다. 정자각은 능제(陵祭)를 올리는 전각으로 신어상(神御牀)을 비롯한 각종 상탁(床卓)과 기물을 놓아두었다.
능상 주위에는 여러 가지 호위 석물(石物)이 배치되어 왕의 존엄성을 상징했다. 석물들은 삼단의 계체석(階砌石)으로 구분하여 설치했다. 상단은 왕을 위한 공간으로서 능상의 남쪽을 제외한 3면에 나지막한 곡장(曲墻)을 설치하여 둘러쌓고, 그 안에는 잡귀를 막아주는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을 빙 둘러 배치했다. 곡장 안쪽 좌우에 망주석(望柱石)을 1개씩 세웠으며, 능 앞에는 석상(石床)을 설치했다. 가운데 단에는 문인석(文人石)과 석마(石馬)를 좌우에 벌여 배치하고 그 사이 중간 지점에 장명등(長明燈)을 석상 앞으로 설치하였다. 하단에 무인석(武人石)과 석마를 배치하였다.
왕릉의 조성을 마친 후에 능에 이상이 있을 경우나 오래된 능을 보수할 때는 따로 산릉수개도감을 설치하였으며, 각 능의 도형을 그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자료로 삼았다(『세종실록』 24년 5월 21일). 왕릉은 정기적으로 판서(判書)급의 대신으로 하여금 가서 살피도록 하였으며, 그 결과를 순심안(巡審案)으로 기록하여 보관하였다.
이와 같이 산릉도는 산릉의 실제 지형과 지세 그리고 능에 설치된 건물 등을 자세하게 그려 국장이 마무리된 후 제작되었으며, 3본이 제작되어 각각 승정원, 예조, 관상감에 보관되었다(『영조실록』 30년 8월 17일).
1392년(태조 1년) 태종이 정릉(定陵), 화릉, 덕릉, 안릉 등 함경도에 있는 산릉의 형세를 그린 그림을 태조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초기부터 산릉도가 제작되어 이후 지속적으로 모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태조실록』 1년 10월 28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북도각릉전도형(北道各陵全圖形)」이 대표적인 예로, 함경도에 소재한 이성계의 4대조들의 능과 태조와 관련된 사적지를 영조대에 그린 작품이다.
사료적 가치
산릉도는 조선 왕실의 상례(喪禮)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료이다. 왕이 국장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산릉을 조영할 때 참고로 활용되었으며, 왕실 능에 대한 일률적인 관리를 위해 상태를 점검하고 파악하기 위한 기초 자료가 되었다.
참고문헌
- 정해득, 『조선 왕릉제도 연구』, 신구문화사, 2013.
- 신동철, 「조선 후기 건축도설의 표현기법에 관한 연구-산릉도감을 중심으로」, 『건축역사연구』 16, 한국건축역사학회, 1998.
- 이예성, 「Ⅴ. 조선 후기의 왕릉도」, 『조선왕실의 미술문화』, 대원사, 201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