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옥(邪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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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천주교로 인해 발생한 옥사.

개설

천주교로 인해 발생한 공식적인 사옥(邪獄)은 1791년(정조 15)에 시작되어 1873년(고종 10)에 종결되었다. 그 중에서도 1801년(순조 1)의 신유사옥(辛酉邪獄), 1839년(헌종 5)의 기해사옥(己亥邪獄), 1846년(헌종 12)의 병오사옥(丙午邪獄), 1866년(고종 3)에 시작되어 1873년까지 지속된 병인사옥(丙寅邪獄)을 4대 사옥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밖에도 지방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옥들이 많았다. 천주교회에서는 이 사옥을 천주교 탄압에 초점을 맞추어 박해(迫害)라고 하며, 이때 처형된 신자들을 순교자(殉敎者)라고 한다. 또 천주교 신자들이 당한 수난이라는 의미에서 교난(敎難)이란 용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역사적 배경

사옥의 배경으로는 첫째 사상적인 충돌을 들 수 있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이념 아래 유교조차 국사(國事)에 종속되어 있었고, 따라서 천주를 만유(萬有) 위에 있는 절대자로 받드는 천주교 교리는 결코 용인될 수 없었다. 게다가 벽이단 사상에서 본다면 그 교리는 서양의 사학(邪學)일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 사회·윤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천주교의 평등 교리는 조선의 계급주의와 상충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은 사회 질서와 가부장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무리이자 통화(通貨)·통색(通色)의 무리로 간주되었다. 특히 천주교회의 제사 금지령은 충효의 근본 윤리를 파괴하는 것으로 결코 용인될 수 없었다.

세 번째로 정치적인 배경은 붕당과 관련이 있다. 특히 사옥 초기에는 기호남인의 일부 소장 학자들과 천주교와의 관계가 문제를 야기하였다. 그 결과 남인 안에서도 공서계(攻西系)와 친서계(親西系)가 구분되었고, 공서계 인물들은 정적이던 노론 벽파의 인물들과 함께 친서계나 이에 동조하는 시파 세력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네 번째로 외교적 측면에서는 비밀리에 북경을 왕래하면서 서학서를 들여오거나 신부(神父)를 영입하는 천주교 신자들의 활동이 위정자들을 자극하였다. 특히 사영백서(嗣永帛書)에서 확인된 것처럼 교회 밀사들이 북경 교회를 통해 서양의 선교사와 선박을 요청한 사실은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인식되었다.

이 밖에도 조선에서 활동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이 편 선교 위주의 정책이 조선의 사회·문화와 융화되지 못함으로써 사옥의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지적도 있다.

발단

1784년(정조 8) 겨울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에 발생한 최초의 사건은 다음해 봄에 일어난 을사추조지옥(乙巳秋曹摘發事)이다. 이는 서울 명례방에서 열린 신자들의 집회가 발각되고, 중인 역관 김범우(金範禹)가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조정의 공식적인 사옥은 아니었으며, 김범우와 함께 체포된 남인의 인물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어 1788년에는 천주교 신자 이승훈(李承薰)·정약용(丁若鏞) 등이 1787년 서울 반촌(泮村)에서 교회 서적을 읽은 사실이 폭로되는 정미반회사(丁未泮會事)가 발생하였다.

최초의 공식적인 사옥은 1791년의 신해사옥(辛亥邪獄)으로, 그 발단이 된 것은 북경주교 구베아([湯士選], A. de Gouvea)가 조선교회에 명한 조상 제사 금지령이었다. 이때 전라도 진산(珍山)에 살던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사른 죄목 아래 전주에서 군문효수되었다. 이것이 바로 진산양적사(珍山兩賊事)로, 이후로 진행된 사옥 과정에서 일부 지도층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유배형을 받았다(『정조실록』 15년 11월 8일).

이어 1795년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영입하는 데 앞장섰던 윤유일(尹有一)·지황(池璜)·최인길(崔仁吉)이 포도청에서 장살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이가환(李家煥)과 정약용이 좌천되었다. 또 1797년에는 충청도에서, 1800년에는 경기도 여주·양근 지역에서도 연이어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정조와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의 비호 아래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경과

1800년 정조의 죽음 이후 정세는 일변하였다. 1801년 1월 10일(양력 2월 22일) 수렴청정을 하던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명으로 반포된 사학징치령(邪學懲治令)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곧 신유사옥(辛酉邪獄)이다(『순조실록』 1년 1월 10일). 이때 기호남인의 유림 권철신(權哲身)을 비롯하여 사학의 3흉으로 지목되던 이가환·이승훈·정약용과 정약전(丁若銓)·정약종(丁若鍾) 형제, 서울의 최창현(崔昌顯)·강완숙(姜完淑), 충청도의 이존창(李存昌), 전라도의 유항검(柳恒儉) 등 대부분의 지도층 신자들은 물론 이들과 관련된 신자들, 신부 주문모 등이 참수되거나 유배형을 받았다. 또 같은 해 가을에는 충청도 제천에 은거해 있던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됨과 동시에 그가 북경에 보내려고 한 백서(帛書)가 압수되었고, 그 내용은 조정 안팎으로 큰 파란을 일으켰다.

신유사옥은 1801년 12월 22일(양력 1802년 1월 25일) 토사반교문(討邪頒敎文)이 반포되면서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순조실록』 1년 12월 22일). 그러나 천주교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각 지역에는 교우촌(敎友村)이라 불리는 비밀 신앙 공동체들이 형성되면서 천주교가 하층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반교문이 사옥의 법적인 근거가 되면서 1815년에는 경상도를 중심으로 을해사옥(乙亥邪獄)이, 1827년에는 전라도·경상도에서 정해사옥(丁亥邪獄)이 발생하였다.

이후 1830년대 초까지 대규모의 사옥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838년 말 우의정이지연(李止淵)이 벽파인 풍양조씨 세력과 손을 잡고 안동김씨 세력을 정치적으로 제거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사옥이 시작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기해사옥(己亥邪獄)이다. 1839년 3월 5일(양력 4월 18일) 이지연이 주청한 사학징치령을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윤허하면서 시작된 기해사옥은 같은 해 10월 18일(양력 11월 23일)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반포될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인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范世亨], L. Imbert), 신부 모방([羅], P. Maubant)과 샤스탕([鄭], J. Chastan)을 비롯하여 이들을 조선에 영입해 온 밀사 정하상(丁夏祥)·유진길(劉進吉)·조신철(趙信喆) 그리고 서울과 경기도·충청도·전라도 등지에서 체포된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다.

기해사옥 이후 국경 감시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45년에는 중국 유학을 마친 조선인 신부 김대건(金大建)이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高], J. Ferréol), 신부 다블뤼([安敦伊], A. Daveluy) 등과 함께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김대건이 체포되면서 사옥이 시작되어 여러 신자들이 그와 함께 처형되었으니, 이것이 곧 병오사옥(丙午邪獄)이다.

이후로도 프랑스 선교사들의 입국은 계속되었고, 1849년 말에는 두 번째 조선인 신부 최양업(崔良業)이 귀국하였다. 뿐만 아니라 1856년에는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張敬一], S. Berneux)가 입국하면서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고 신자수도 증가하였다. 그러던 중 1860년(철종 11)에는 여러 지방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기도 했으나 곧 잠잠해지고 말았다. 이처럼 1846년 이후 고종 즉위 초까지 공식적인 사옥이 일어나지 않으면서 조선의 천주교 신자 수는 1865년 말 약 23,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초부터 흥선대원군의 명에 따라 전국에 걸쳐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바로 병인사옥(丙寅邪獄)의 시작이다.

병인사옥은 1866년 1월 5일(양력 2월 19일) 체포된 신자 전장운(全長雲)·최형(崔炯)에게 참수형이 내려지면서 본격화되었다. 그러고 나서 4일 뒤에는 주교 베르뇌가 체포되었고, 이어진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 1868년의 오페르트(Oppert) 사건,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 등으로 인해 1873년 말 흥선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 중에서도 1868년 독일인 오페르트 일행이 충청도 덕산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고 한 사건 때문에 수그러들던 사옥이 가열되었다는 점에서 이후의 사옥을 무진사옥(戊辰邪獄)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 동안 조선에서 활동해 오던 주교 베르뇌와 다블뤼 등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하여 홍봉주(洪鳳周)·남종삼(南宗三)·황석두(黃錫斗)·장주기(張周基) 등 지도층 신자들은 물론 8,000명 내외의 신자들이 처형되었다. 천주교 신자수가 병인사옥 이전의 숫자를 회복하는 것은 이로부터 20여 년 후였다.

결과 및 의의

병인사옥이 끝난 뒤에도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 사건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선교사들은 1876년부터 다시 조선에 입국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입국한 선교사들 중에서 1878년에는 신부 리델([李福明], F. Ridel)이, 다음해에는 신부 드게트([崔東鎭], V. Deguette)가 체포되었으나 처형되지 않고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한편 드게트 체포 때는 여러명의 신자가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아사하기도 했지만, 이 사건이 사옥으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조선의 문호 개방과 함께 공식적인 사옥이 종결된 것이다.

이와 같이 80여 년 동안 진행된 사옥은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선 문화적으로는 서양의 신문화 수용 운동과 짝을 이루면서 전개되던 천주교의 종교 운동을 완전히 변질시켰다. 다시 말해 신해사옥으로 위축된 조선의 신문화 수용 운동이 신유사옥 이후 자취를 감추게 되고, 이때부터는 천주교 전파가 오로지 하층민 중심의 민중 종교 운동으로 전개된 것이다.

다음으로 천주교에 대한 사옥은 신문화 수용 내지는 천주교 신앙과 깊이 연결되어 있던 남인 세력이 정치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는 배경이 되었다. 다시 말해 탕평의 일각이 무너지면서 노론에 의한 세도 정치가 지속되는 데 하나의 요소가 된 것이다.

세 번째로 사옥이 거듭될 때마다 새로운 지도자를 잃게 된 천주교 신자들은 유민으로 전락하여 일반 사회와 유리된 채 산간 지대에서 고립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때 그들의 신앙과 생활 기반이 된 것은 비밀 신앙 공동체인 교우촌이었다. 그러면서 위정자들은 이렇게 유민화된 천주교 신자들을 제사 폐지 문제, 전통 윤리를 무너뜨리는 천주교의 평등사상과 관련지어 반사회 세력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한편 교회에서는 1925년에 기해·병오사옥으로 처형된 신자들 중에서 79명을, 1968년에는 병인사옥으로 처형된 신자들 중에서 24명을 복자(福者)로 선포하였고, 1984년에는 이들 103명을 성인(聖人)으로 선포하여 공경하고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사학징의(邪學懲義)』
  • 『벽위편(闢衛編)』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
  • 『일성록(日省錄)』
  • 『기해일기(己亥日記)』
  • 『치명일기(致命日記)』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 『병인치명사적(丙寅致命史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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