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영백서(嗣永帛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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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신자 황사영의 비밀 서한인 백서로 인해 발생한 사건.

개설

백서(帛書)란 명주에 쓴 서한이라는 뜻의 일반명사로, 천주교 신자들은 이를 통해 북경 교회와 연락을 취해 왔다. 그중에서도 황사영(黃嗣永)이 작성한 백서는 북경에 전달되기 전에 압수되었으며, 그 사안의 중대함 때문에 이후 고유명사처럼 불리게 되었다. 이 사영백서(嗣永帛書)가 작성된 곳은 충청북도 제천이고, 완성된 날짜는 1801년(순조 1년) 9월 22일(양력 10월 29일)이다.

역사적 배경

사영백서의 첫 번째 배경으로는 천주교 신자들이 일찍부터 북경교회에 서양 선교사와 선박 파견을 요청한 사실을 들 수 있다. 두 번째 배경은 1801년의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와 지도층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처형된 데 있었다. 세 번째 배경은 국가보다 종교를 우선시했던 황사영의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발단

신유사옥 이후 제천에 은거한 황사영은 김한빈(金漢彬)과 황심(黃沁)을 통해 사옥의 전개 과정을 살폈다. 그리고 이곳에서 122행 13,384자에 달하는 백서를 작성하여 북경주교 구베아([湯士選], A. de Gouvea)에게 보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를 전달하기로 한 옥천희(玉千禧)가 체포되고, 그의 밀고에 따라 황심과 황사영·김한빈이 연달아 체포되는 과정에서 백서도 압수되었다.

경과

사영백서의 내용은 머리말, 신유사옥의 진행 과정, 다섯 가지의 교회 재건 방안, 그리고 맺음말로 구분된다. 여기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교회 재건 방안으로, 특히 교황과 청 황제를 통한 신앙의 자유 획득, 청에 의한 조선의 내복(內服)·감호책(監護策), 서양 선박을 통한 무력 개교가 3흉조로 지목되었다. 그 결과 이 문제는 천주교 반역자들의 음모 사건으로 확대되었으며, 황사영 일행은 국사범으로 처형되었다. 아울러 황사영의 처숙부인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 형제도 유배지에서 끌려와 문초를 받은 뒤 흑산도와 강진으로 각각 이배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백서를 꾸며 만든 진주사행등본(陳奏使行謄本) 즉 가백서(假帛書)를 청에 전달하였다. 한편 백서 원본은 의금부에 소장되어 있다가 1894년의 문서 소각 때 발견되어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閔德孝], G. Mutel)에게 전달되었으며, 이후 뮈텔은 사본을 제작하고 프랑스어 백서를 간행한 뒤 1925년 그 원본을 교황청에 기증하였다.

의의

사영백서는 천주교도가 반역의 무리라는 점을 확인시켜 주는 동시에 사옥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었고, 이후 황사영의 의도는 교회 안팎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서는 당대의 견문 기록이라는 점에서 천주교회사는 물론 조선 후기사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벽위편(闢衛編)』
  • 『사학징의(邪學懲義)』
  • 여진천, 『황사영 「백서」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9.
  • 박광용, 「황사영백서 사건에 관한 조선왕조의 반응」, 『신유박해와 황사영백서사건』,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3.
  • 방상근, 「황사영 백서의 분석적 이해」, 『교회사연구』13,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 趙珖, 「黃嗣永帛書의 社會思想的 背景」, 『사총』17·18 , 역사학연구회, 1977.
  • 최완기, 「황사영 백서 작성의 사상적 배경」, 『신유박해와 황사영백서사건』,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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