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연(權尙然)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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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권상연 |
한글표제 | 권상연 |
한자표제 | 權尙然 |
분야 | 천주교도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정조 |
집필자 | 정주영, 김가람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751년(영조 27) |
사망 | 1791년(정조 15) |
본관 | 안동(安東) |
주거지 | 진산(珍山) |
증조부 | 권이현(權以鉉) |
조부 | 권기징(權沂徵) |
부 | 권세학(權世學) |
모_외조 | 전주 이씨(全州李氏)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권상연(權尙然)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정조실록』 15년 11월 7일, 『정조실록』 15년 11월 7일, 『정조실록』 15년 10월 24일, 『정조실록』 15년 10월 23일, 『정조실록』 15년 11월 7일, 『정조실록』 15년 11월 7일, 『정조실록』 15년 11월 8일 |
목차
총론
[1751년(영조 27)~1791년(정조 15) = 41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 때의 천주교도. 세례명은 야고보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거주지는 진산(珍山)이다. 아버지는 권세학(權世學)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할아버지는 권기징(權沂徵)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권이현(權以鉉)이다. <진산사건(珍山事件)> 당시 세상을 떠난 윤지충(尹持忠)의 어머니 안동 권씨(安東權氏)가 고모이기도 하다. 윤지충과 함께 <신해박해(辛亥迫害)> 때 처형당하면서 조선의 첫 번째 천주교 순교자가 되었다.
정조 시대 활동
권상연(權尙然)의 고종 사촌 윤지충은 1784년(정조 8) 서울에서 김범우(金範禹)로부터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등의 천주교 서적을 빌려 보았다. 이때 권상연도 이러한 천주교 서적들을 보았으나 천주교에 입교로는 이어지지 않았다.(『정조실록』 15년 11월 7일) 이후 윤지충이 자신의 고종 사촌 정약전(丁若銓)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이어 이승훈(李承薰)으로부터 세례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전교 활동을 하면서 권상연 또한 윤지충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런 가운데 조선의 천주교회는 여러 변화가 있었다. 서학(西學)이라는 학문으로 시작한 조선의 천주교는 선교사가 없었기 때문에 교리적으로 상당히 취약하였으므로, 몇 가지 교리적 의문을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선교사 파견 또한 요청하기 위하여 1789년(정조 13)과 1790년(정조 14) 조선 천주교회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윤유일(尹有一)을 북경(北京)으로 파견하였다. 이때 윤유일은 구베아(Gouvea) 주교로부터 조상의 제사를 금지하는 내용이 포함된 서한을 받아 왔다. 그 결과 이를 수용하지 못한 많은 양반 신자들이 천주교회를 떠났으나, 권상연은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하였다.(『정조실록』 15년 11월 7일)
그런데 1791년(정조 15) 5월 권상연의 고모이자 윤지충의 어머니인 안동 권씨가 세상을 떠났고, 윤지충과 권상연은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결정하였다.(『정조실록』 15년 10월 24일) 이 사건이 바로 진산사건으로, 곧 부모의 시체를 버렸다는 소문으로 부풀려져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당시 가주서(假注書)로 있던 홍낙안(洪樂安) 또한 이 소문을 듣고는 진산군수(珍山郡守)신사원(申史原)에게 편지를 보내 사건을 빨리 해결하지 않은 것을 힐책하였다. 그리고 좌의정채제공(蔡濟恭)에게도 편지를 보내 진산사건의 진상을 파헤칠 것을 요구하였다.(『정조실록』 15년 10월 23일),(『정조실록』 15년 11월 7일) 결국 조정에서는 권상연과 윤지충의 조사를 결정하였고, 신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신주를 불태운 것과 천주교를 믿는 것, 제사를 폐지한 것은 인정하였으나 부모의 시체를 버리고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결백을 주장하였다.(『정조실록』 15년 11월 7일) 이에 조정에서는 『대명률(大明律)』에 따라 권상연과 윤지충의 흉악함과 패륜을 처벌하기로 결정하였고, 두 사람은 그해 11월 8일 전주에서 참수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죄와 연좌되어 진산군(珍山郡)은 5년 동안 현(縣)으로 강등되었고, 진산군수(珍山郡守)신사원(申史源)도 유배형에 처해졌다.(『정조실록』 15년 11월 8일) 그러나 이 사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믿었다며 권일신(權日身)과 이승훈 등의 천주교도들이 체포되는 신해박해로까지 확대되었다.
한편 권상연은 2014년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다.
일화
권상연이 세상을 떠난 후 조선 천주교회 신자들은 그와 윤지충의 피로 젖었던 수건을 간직하였다.[『사학징의(邪學懲義)』] 이는 조선 천주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인 윤지충에 대한 공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방목(榜目)』
- 『일성록(日省錄)』
- 『눌암기략(訥菴記略)』
- 『벽위편(闢衛編)』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만가보(萬家譜)』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사학징의(邪學懲義)』
- 한국천주교회사 편, 『한국가톨릭대사전』9,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