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崔炯)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814년(순조 14)~1866년(고종 3) = 53세]. 조선 후기 헌종(憲宗)~고종(高宗) 때의 천주교도로, <병인박해(丙寅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베드로. 거주지는 충청도 공주와 서울이다. 아버지는 최인호(崔仁浩)이며, 어머니는 황씨(黃氏)이다. 동생은 김대건(金大建)·최양업(崔良業)과 함께 신부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을 갔다 병사한 최방제(崔方濟)이다.

헌종~고종 시대 활동

‘치장’이라고도 불린 최형(崔炯)은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35년(헌종 1) 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 모방(Maubant) 신부는 최형의 동생이었던 최방제를 신학생으로 선발하였고, 최형은 자신의 활동을 보좌하는 복사로 선발하였다.

1839년(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가 발발하면서 최형은 이듬해인 1840년(헌종 6) 여러 신자들과 체포되었으나 중간에 돈만 갈취당한 후 풀려났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하] 이후에는 1846년(헌종 12) 상해(上海)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온 김대건 신부를 도와 페레올(Ferreol) 주교 및 다블뤼(Daveluy) 신부를 입국시켰다. 그러나 <병오박해(丙午迫害)>로 김대건 신부가 사망하자, 곧 서울로 올라와 순청동(巡廳洞)에 거주하며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다블뤼 신부의 복사로 활동하면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종교 서적을 베끼거나 묵주를 만들어 팔며 생활하였다. 1856년(철종 7) 베르뇌(Berneux) 주교가 입국한 후에는 교회 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는데, 1861년(철종 12) 주교의 명에 따라 서울에 인쇄소를 세우고 『성교일과(聖敎日課)』, 『성찰기략(省察記略)』 등의 교회서적을 간행하기도 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하],[『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1863년(철종 14) 베르뇌 주교로부터 대신 세례를 주는 대세 권한을 부여받기도 한 최형은 1866년(고종 3) 조선 최대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가 발발하여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고 그 때 압수한 교회 서적들이 최형이 인쇄한 것이라는 이선이(李先伊)의 밀고로 그 해 1월 5일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신문을 받은 후, 의금부로 압송되었다.(『고종실록(高宗實錄)』 3년 1월 5일),(『고종실록』 3년 1월 16일) 신문 기간 중 그가 주도적으로 관여하여 간행하였던 교회 서적들은 모두 소각되었다. 형조로 다시 이송되어 조사를 받은 최형은 결국 사형이 결정되어 1월 2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고종실록』 3년 1월 23일),[『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3년 1월 23일] 당시 그의 나이 53세였다.

최형은 1968년 10월 6월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어 성인 반열에 올랐다.

참고문헌

  • 『고종실록(高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
  • 『치명일기(致命日記)』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11.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