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촌(泮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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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균관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형성된 마을.

개설

반촌은 중국 주나라 때 제후의 국학인 반궁(泮宮) 주위에 형성된 마을에서 유래되었다. 이 반촌이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계승되면서 정착되었다. 조선시대의 반촌은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옮겨 온 성균관 노비들이 성균관 동·서편에 형성한 동네이다. ‘반중(泮中)’이라고도 하였다.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싶으나 기숙사에 자리가 없을 때 유생들이 반촌에 임시로 거주하며 공부하기도 했다. 성균관에 인접한 위치와 촌민이 성균관의 각종 잡역을 전담한 기능에서 일종의 치외법권 지대로 취급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성균관 동·서편에는 반촌이라는 동네가 있었는데, 대로를 중심으로 동반촌과 서반촌으로 나뉘었다. 마을 어귀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있었으며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반인(泮人) 또는 관인(館人)이라 하였다. 반인은 모두 고려 때 찬성사를 지낸 문성공 (文成公)안향(安珦)이 국학에 헌납한 노비 100여 명의 후손이다. 이들은 반촌을 형성하고 반촌의 북쪽에 제단을 세워 안향의 제삿날이 되면 제사를 지냈다. 반인은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옮겨 온 사람들이라서 그들의 말과 곡하는 소리는 개성 사람의 말투였다고 한다. 남자의 의복은 사치스럽고 화려하며 이상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기개가 높고 의협심이 있어 죽는 것을 마치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듯이 여긴다고 하였다.

조직 및 역할

반촌에 사는 반인들은 6개월마다 번(番)을 나누어 성균관에 입역(入役)하였는데, 이때 문묘의 수직(守直), 성균관 식당지기, 밥 짓고 물 긷는 부목(負木), 사환(使喚) 일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각기 생업에 종사하였는데, 주로 도축업에 종사하였다. 반촌은 반인 이외의 입주는 허락하지 않았다[『영조실록』 19년 11월 6일].

생원이 원점을 쌓기 위해 또는 과거 준비를 위해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싶으나 기숙사에 자리가 없으면 반촌에 임시로 거주하며 공부하기도 했다. 기숙사에 있던 유생이 병이 들어 심해져도 반촌으로 나가 요양을 했다. 절도 등 법규 위반 행위를 해도 반촌에 숨으면 공자의 사당이 가깝다 하여 단속 관원이 들어갈 수 없는 일종의 특수 지역으로 취급되었다[『영조실록』 6년 10월 11일].

변천

반촌 동북쪽의 산과 계곡 사이에는 빼어난 경치가 많아 봄날에 노닐면서 감상하는 사람이 많았다. 원래의 반촌은 성균관 고개부터 혜화문에 이르는 길을 경계로 하였는데, 정조대에 경모궁 앞의 연못가에 돌을 세워 반촌의 경계로 삼아, 연못의 북쪽을 모두 반촌이라 했다.

이승훈은 반촌에 들어가 젊은 선비들에게 천주교를 전도했다고 한다[『정조실록』 15년 11월 3일].

참고문헌

  • 『반중잡영(泮中雜詠)』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