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풍석(屛風石)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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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병풍석 |
한글표제 | 병풍석 |
한자표제 | 屛風石 |
상위어 | 능원(陵園) |
동의어 | 사대석(莎臺石), 호석(護石) |
관련어 | 부석소(浮石所), 산릉도감(山陵都監), 수석소(輸石所) |
분야 | 왕실/왕실건축/능·원·묘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경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병풍석(屛風石)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즉위년 9월 25일, 『영조실록』 20년 8월 11일, 『인조실록』 8년 2월 30일, 『현종개수실록』 1년 7월 26일, 『정조실록』 13년 8월 16일 |
능원이나 규모가 큰 무덤을 만들 때, 봉분이 무너지지 않도록 주위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석물.
개설
병풍석은 봉분을 형성한 흙과 사초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막는 기능을 하는 석축의 일종으로, 호석(護石) 또는 사대석(莎臺石)이라고 하며 줄임말로 병석(屛石)이라고도 한다. 신라 신문왕릉의 호석을 필두로 신라시대의 능제를 근간으로 삼은 고려시대에는 12각을 기본으로 한 호석이 채택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시기에 따라 크기와 부재의 구성, 축조 방식 등에 변화가 있었으나, 병풍석의 기능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병풍석은 그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릉의 능제 가운데서 설치 여부를 두고 가장 논의가 분분하였다. 병풍석이 능제 간소화의 주된 대상이었기 때문인데, 결국 공력이 많이 드는 것이 그 이유였다. 병풍석 폐지의 시초가 된 것은 석실(石室)과 사대석을 쓰지 말라는 세조의 유명이었다. 그에 따라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에는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았고, 뒤이어 천장한 세종의 영릉(英陵)도 광릉의 능제를 따랐다. 그러나 병풍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다가 현종 때 효종의 영릉(寧陵)을 옮기면서는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았지만, 그 뒤 현륭원(顯隆園), 홍릉(洪陵), 유릉(裕陵)에서는 다시 사용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오늘날 병풍석이 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조선시대의 능원은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을 비롯하여 헌릉(獻陵), 현릉(顯陵), 선릉(宣陵) 등 14개소에 이른다.
능원의 병풍석은 대개 12각형으로 모양을 만드는데, 의례에 따라 부재의 크기는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대체로 병풍석 네 켜로 석축을 쌓는다. 가장 아래에 초지대석(初地臺石)과 정지대석(正地臺石)으로 바탕을 형성한 다음, 그 위에 면석(面石)과 우석(隅石)으로 한 켜를 쌓고 다시 만석(滿石)을 덮는 구조이다. 만석 위로는 12각의 대각선 방향마다 인석(引石)을 방사상으로 설치한다. 면석과 우석의 표면에는 무늬를 새기는데, 조선전기까지는 불교적 색채가 강한 무늬가 주류였으나 조선후기에는 모란과 같은 상서로운 문양을 새기는 경향으로 바뀐다. 인석은 돌출된 머리 표면에 좌향(坐向)을 새기거나 꽃을 새겨 마감한다.
홍릉과 유릉에 이르면 부재의 명칭을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하는데, 부재의 위치에 따라 면과 모퉁이[隅]를 구분하여 면병풍석, 우병풍석, 정지대석, 우지대석 등으로 이름을 구별하였다.
변천
병풍석이 폐지된 이후에도 간혹 그 장점을 말하며 다시 쓰기를 청하는 신료들이 있었지만, 왕의 의지에 따라 좌절되었다. 1724년(영조 즉위)에는 능침을 오래도록 견고하게 하는 방법은 병풍석을 두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옛 영릉(寧陵)에 물이 스며든 것은 흙을 굳게 쌓지 않아서이지 병풍석 때문이 아니라는 의견이 제기되었지만, 영조는 이를 옳게 여기지 않았다(『영조실록』 즉위년 9월 25일). 영조는 1744년(영조 20)에 병풍석을 없앤 일을 두고, 사왕(嗣王) 준법(準法)이라고 일컬을 만하다고 평가하였다(『영조실록』 20년 8월 11일).
사실 병풍석은 산릉 가운데서 비교적 탈이 많이 나는 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목릉(穆陵)의 경우, 산릉 조성을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병풍석이 기울어지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그에 따라 광내(壙內)에 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고, 지술(地術)을 아는 사람들은 자리가 불길하다며 능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8년 2월 30일).
병풍석은 때로 정치의 쟁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현종 때 효종의 영릉을 천장하게 된 동기도 병풍석과 가석의 틈을 공사 부실 탓으로 몰아가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현종개수실록』 1년 7월 26일).
현륭원을 조성하면서 일시적으로 병풍석을 되살린 정조는 자손으로서 성의를 다하기 위해서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그러면서도 난간석은 쓰지 말도록 하고, 더욱이 이후 능역에서는 병풍석에 관계된 갖가지 석물을 다시는 쓰는 일이 없도록 하라 명하였다(『정조실록』 13년 8월 16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김상협, 「조선 왕릉 석실 및 능상구조의 변천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 문영식, 「조선후기 산릉도감의궤에 나타난 장인의 조영활동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 이희중, 「17, 18세기 서울 주변 왕릉의 축조, 관리 및 천릉 논의」, 『서울학연구』17,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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