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영(朴紹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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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65년(세조 11)~1518년(중종 13) = 54세]. 조선 중기 성종~중종 때 활동한 문신.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자는 길보(吉甫)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조부는 밀산군(密山君)박중손(朴仲孫)이고, 아버지는 예조 참의(參議)박미(朴楣)이며, 어머니 진산 강씨(晉山姜氏)는 돈녕부(敦寧府)지사(知事)강석덕(姜碩德)의딸이다.

성종~중종 시대 활동

1485년(성종 16)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하였다. 그 뒤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갔다. 그의 가문은 증조부 이래 4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 또는 홍문관에 들어갔고, 그의 형제 네 사람이 모두 문과 출신으로서 일세에 문명을 날렸다.

1497년(연산군 3) 9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11월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는데, 1502년(연산군 8) 5월 다시 홍문관 부응교가 되었다. 1503년(연산군 9) 11월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그 해 12월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1월 홍문관 전한(典翰)이 되고, 그 해 3월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 같은 해에 이세좌(李世佐)가 임금이 내린 술을 엎질렀으나 그가 불경죄로 탄핵하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해 4월 태(笞)형을 받고 진천(鎭川)에 유배되었다. 또 1506년(연산군 12) 8월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1509년(중종 4) 형조 참의(參議)가 되었고, 1512년(중종 7)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며, 1513년(중종 8) 3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이때 이절(李茁)의 귀양지를 경기 지역으로 옮긴 것과 유자광(柳子光)이 죽은 뒤 훈적(勳籍)을 회복시킨 조치를 부당하다고 논하였다. 이때 참찬관(參贊官)을 겸하였다. 1514년(중종 9) 예조 참의가 되었고, 1515년(중종 10) 2월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1517년(중종 12) 호조 참의가 되었는데,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승하하였을 때 황해도 관찰사로 창기(娼妓)를 데리고 잠을 잤다고 하여 잠시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518년(중종 13) 함경도 관찰사를 자원하여 나갔다가 임지에서 돌아가니, 그의 나이 54세이다.

묘소와 가족

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 553-1 두응촌 선영(先塋)에 있다. 부인 해주 오씨(海州吳氏)는 오한(吳漢)의 딸이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