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성(木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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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성 가운데 첫 번째 행성. 세성(歲星)이라고도 한다.

개설

오행성은 고대 천문학에서 다섯 행성으로 꼽던 세성(歲星)·형혹(熒惑)·진성(鎭星)·태백(太白)·진성(辰星)을 말한다. 이 각각은 춘추전국시대 후기에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오행(五行) 사상이 발달하며 목성·화성·토성·금성·수성으로 이름이 변하였다. 오행은 또한 다섯 방위[五方]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각각 동쪽·남쪽·중앙·서쪽·북쪽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행성 가운데 첫 번째 행성에 해당하는 목성은 고대에 세성이라 불렀으며, 동쪽을 의미한다.

서양에서는 목성을 신들의 제왕인 제우스의 이름을 따서 주피터라 불렀다. 목성은 밝기가 -1.4등급에서 -2.8등급으로 금성 다음으로 밝은 행성이며, 밝아서 낮에도 가끔 관찰할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목성에 대한 전통 천문학적 인식은 주로 복을 주관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초기에 간행된『천문류초(天文類抄)』에서 목성은 복을 주관하고 대사농(大司農)을 관장하며, 천하의 제후와 왕의 허물을 맡아 다스린다고 보았다. 목성이 한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해당하는 나라의 덕이 두텁고 오곡이 번창하여 풍년이 든다고 하였다. 또 목성이 머무는 나라는 정벌할 수가 없으며, 목성이 떠나는 나라는 흉해지고, 목성이 찾아가는 나라는 길해진다고 보았다.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목성 관련 기사는 400건이 넘으며, 달이 목성을 범하였다는 기록을 시작으로(『태조실록』 2년 2월 26일), 대부분 목성의 이동 과정을 관측한 내용들이다. 목성은 겉보기 밝기가 금성 다음으로 밝아 쉽게 관찰되는 행성이다. 관측 기록 중 빈도가 높은 편에 속하는 것은 달이 목성을 엄폐하거나 범하는 월엄목성(月掩木星)과 월범목성(月犯木星) 현상을 꼽을 수 있다. 태조 연간 11건 기록 중에 3건이 이와 관련되며, 태종 연간 13건 중에서도 4건이 이와 관련되었다. 이 외에 목성이 달 앞으로 지나가는 목성관월(木星貫月) 현상도 관측되었다(『태종실록』 1년 4월 12일). 여기서 엄폐한다[掩]는 것은 그 앞을 막는 것을 의미하며, 범한다[犯]는 것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목성이 다른 별자리에 들어갔다고 하거나 다른 별자리를 범하였다고 하는 성입(星入)과 성범(星犯) 기록들이다. 목성이 우림성(羽林星) 분야로 들어갔다고 하였는데, 목성이 황도(黃道) 궤도를 따라 이동하므로 우림성은 황도에 걸쳐 있거나 근접한 별자리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태조실록』 2년 8월 6일). 목성이 여귀성(輿鬼星)과 적시성(積尸星)을 5일간 계속 범하였고(『태조실록』 6년 3월 19일), 목성이 여귀성과 적시성에 접근하기도 하였다(『태조실록』 6년 8월 3일). 같은 해에 목성이 여귀성에 들어갔으며(『태조실록』 6년 12월 15일), 이듬해 목성이 여귀성에 들어갔다(『태조실록』 7년 1월 15일). 목성이 여귀성과 적시성을 범하여 6일간 머물러 있었으며(『태조실록』 7년 3월 20일), 목성이 적시성을 범하기도 하였다(『태조실록』 7년 4월 3일). 이듬해 목성이 헌원성(軒轅星) 좌각(左角)을 범하였고(『정종실록』 1년 2월 19일), 목성이 좌집법성(左執法星)을 범하기도 하였다(『정종실록』 1년 9월 10일). 또한 이듬해 밤 4경에는 목성이 저성(氐星)에 들어갔다고 기록하였다(『정종실록』 2년 12월 19일).

이러한 일련의 관측 기록을 종합하면, 목성이 외행성 운동의 특징인 유(留)와 역행 현상을 보인 것을 읽을 수 있다. 여기서 ‘유’란, 행성이 잠시 멈춘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또한 목성이 1397년인 태조 6년에는 여귀성 자리로 이동하였고, 1400년인 정종 2년에는 저성 자리까지 운행하여 간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목성이 저성 자리에 들어간 것에 대해서는 서운관(書雲觀)주부(主簿) 김자수(金子綏)가 “저성은 천자의 정침(正寢)이자 천자가 편안히 쉬는 방이며 후궁(後宮)에 속하고 여주(女主)에 속합니다” 하는 점성적 해석을 남겼다. 또한 명종 때에는 목성이 퇴행하여 여귀성으로 들어갔다고 하면서, 목성의 역행을 직접 기록하였다(『명종실록』 19년 1월 7일).

『조선왕조실록』에는 목성이 풍수지리 용어로도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 경력(經歷)나부교(羅敷敎)가 이르자 왕이 마중 나가 사배(四拜)를 주고받았을 정도로 극진히 접견하였다. 그는 어제 구궐(舊闕)의 터를 보았는데 송경(松京)도 이에 미치지 못한다 하면서, 이후 평복하여 다시 지을 때, 북방의 탐랑목성(貪狼木星)은 매우 좋지만, 청룡이 낮고 백호가 높으므로 이것이 요동하고 전란을 일으키는 형상이 되고 있다는 풍수적 진단을 하면서, 만약 소격서(昭格署)의 물과 인왕산(仁王山)의 물을 모두 궁궐 담장 안으로 끌어들여 감아 돌게 하면 좋게 될 것이라고 조언하였다(『선조실록』 30년 6월 29일).

광해군 때에도 풍수지리 용어로 목성을 사용한 예가 있다. 선수도감(繕修都監)이 임란으로 불탄 새 궁궐 짓기가 곤란한 문제를 거론하였는데, 자신들은 비록 도감 직책을 맡고 있으나 풍수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면서, ‘지난 을묘년은 조성(造城)하기에 아주 길한 해였는데도 단지 명정전(明政殿)좌향(坐向)이 목성(木星)을 범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부득이 대략 수리만 하였습니다’라면서 안타까움을 에둘러 말하고 있다. 이어서 그다음 해인 병진년 이후로 4, 5년 동안은 조성하기에 길한 해가 아니라고 하기에 역사를 진행할 수 없었으며, 그에 따라 몇 년간 큰 역사로 물력(物力)이 모두 고갈되었고 도감에 남은 얼마 안 되는 쌀과 포목으로는 몇 달의 지공도 지탱해 나가기가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또 비록 전(殿) 하나를 먼저 짓고자 하더라도 반드시 터를 닦고 담장을 쌓은 뒤에야 전을 세울 수가 있다 하면서, 그럼에도 지금은 자본이 턱없이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집을 짓기 전에 먼저 바깥 담장을 쌓는 것은 술가(術家)에서 금하는 것으로, 여염의 일반 사람들도 오히려 꺼리는데, 더구나 제왕이 거처하는 곳이겠습니까?’라고 하며, 술가의 조언과 선수도감의 방향이 어긋나고 있음을 피력하고 있다(『광해군일기』 9년 1월 29일). 이렇게 임란의 호된 피폐를 당하였으면서도 궁궐 공사에 풍수설이 끼어들어 몇 년간 그냥 시간과 물자를 허비하고 있는 세태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 『천문류초(天文類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사기(史記)』「천관서(天官書)」
  • 『한서(漢書)』「천문지(天文志)」
  •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
  • 『여씨춘추(呂氏春秋)』
  • 『회남자(淮南子)』
  • 김일권, 『(동양 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007.
  • 김일권,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 고구려 하늘에 새긴 천공의 유토피아』, 사계절, 2008.
  • 김일권,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 고대부터 조선까지 한국 별자리와 천문 문화사』, 고즈윈,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