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洞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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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향촌에서 군포를 공동으로 부담하는 군역세 납부 방식.

개설

동포제는 조선후기 균역법이 호포법(戶布法)으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과도기적 형태였다. 집단 수취 체제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호포법과 거의 일치하였다. 동포제에 의하면, 군포는 양반·상민을 구별하지 않고 각 읍내 민호의 대소에 따라 분배·징수되었으므로 양반도 물론 함께 납부해야 하였다. 그러나 이를 동포라는 명목으로 집단 납부하였기 때문에 반상의 구별이 전혀 없는 호포법에 비하여 양반의 반발을 크게 사지 않아서 과도적으로 실시될 수 있었다. 동포제의 징수액은 1정(丁)에 대하여 1년에 2냥씩이었고, 그 실시 시기는 철종 말기부터 1871년(고종 8) 호포법이 정식으로 실시되기 이전까지로 보고 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의 군역제는 중세적인 신분제와 공동체적인 향촌사회를 바탕으로 정군(正軍)은 직접 군역에 입역(立役)하고 보인(保人)은 수포(收布)를 통해 정군을 경제적으로 돕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이르러 군역을 지던 일부 농민들이 군역에서 이탈하여 이 같은 제도는 서서히 동요되어 갔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농민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분을 바꾸어 군역에서 탈피하기도 하고 각급 관아의 사모속(私募屬)에 모입(募入)되어 감으로써 중앙에서 배정한 군액(軍額)에는 빠져나가게 되었다.

공동체적인 향촌사회에서 일부 농민들의 피역(避役)은 나머지 농민들에게 부담을 전가시키는 것이었다. 피역을 한 농민은 군역제의 굴레에서 탈피할 수 있었겠지만, 그들이 지던 군액은 그대로 향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향촌사회에서는 어느 지방을 막론하고 군액에 비해 군역을 질 만한 백성의 수가 적은 군다민소(軍多民少)의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군역을 수행해야 할 사람이 죽거나 도망쳤을 때 그 사람의 친척이나 주변 이웃이 대신 군역을 지는 족징(族徵)과 인징(隣徵), 어린아이나 이미 죽은 사람에게도 군역을 담당하게 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백골징포(白骨徵布) 등 군정의 폐단은 이로부터 발생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 농민들의 피역이 일반화되는 가운데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면리분징(面里分徵) 방식이 나타났다. 이것은 면리(面里) 내에서 부족한 군역을 다른 사람으로 채울 수 없을 때, 그 부족액을 평균하여 면리 단위로 분배·납부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동포제는 이렇게 향촌 내부에서 관행화된 공동 부담 방식을 배경으로 하여 성립되었다.

동포제의 등장은 기본적으로 동요하던 신분제를 배경으로 하였고, 이와 함께 반드시 면리별 군액 할당량을 채워야 했던 당시 상황에서 기존에 군역에서 면제되었던 양반 계층에게도 부담을 지우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부에서도 향촌에서 자율적으로 진행되는 동포제의 시행을 부분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용

동포제는 1862년(철종 13) 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중심으로 폭발한 농민 항쟁을 계기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 당시 농민들의 구체적인 요구 조건 속에 동포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에서는 군액의 개인별 파악 방식인 기존의 구파법(口疤法), 즉 역을 지는 구(口)마다 용모 파기(疤記)를 통해 군액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동포제를 병행 실시할 수 있도록 수습책을 제시하였다. 결국 동포제는 확산 일로에 놓이게 되었다. 처음의 동포제는 군액 부족분에 대해서만 공동 부담하도록 하였으나, 이때의 동포제는 부족분이 아니라 전체 군역 총액을 전체 호구 수에 맞게 공동 부담하는 형태였다.

각 지역별로 정착된 동포제는 이처럼 총액제적인 부세 운영의 틀 속에서 운영되었다. 사족을 중심으로 한 향촌 내 계(契) 조직은 관의 부세 수취에 대응하는 기구로서 그 기능이 강화되었다. 향촌 내부에서는 각 면(面)의 계를 중심으로 하여 재원을 확보하고 동포를 납부하는 데 주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계의 운영은 여전히 하층민에게 불리하게 운영되는 사례가 많았다.

사족 세력은 무너져 가는 자신의 향촌 내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당시 가장 첨예한 문제였던 부세 문제에 적극 개입하여 이를 일정하게 개혁해야 했다. 결국 사족 세력도 동포제를 수용하여 군역을 담당하는 데 합의하였다. 그러나 동포제 하에서 사족들이 부담한 것은 물납 형태의 군역이었으며, 실역 형태의 군역은 여전히 하층민들이 담당하였다. 즉, 사족들은 군역 자체를 부담했다기보다는 하나의 세목(稅目)으로 바뀐 군역세의 총량을 채워 내기 위한 재정적 보조를 해 준 셈이었다.

동포 부담 총액은 『양역실총(良役實摠)』의 군액을 기준으로 관에서 파악하고 있는 호총(戶摠)에 부과되었다. 개별 부담액을 살펴보면, 사족층에 유리한 형태로 신분별로 차등 부과되고 있었지만 신분별 부담액의 격차가 점차 해소되어 가는 균세화(均稅化)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변천

동포제의 실시 과정은 신분제에 의한 특권적 부세 체제의 하나인 군역제의 해체 과정이었다. 동포제는 일반 농민들의 끊임없는 피역(避役) 저항의 산물이었으며, 농민들은 1811년과 1862년의 대규모 농민 항쟁을 통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구체화시켜나갔던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조선 사회가 더 이상 중세적인 방식으로 농민들을 지배해 나갈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 동포제는 고종 때 대원군에 의해 실시된 호포법으로 그 내용이 흡수되었다.

참고문헌

  • 김용섭, 『(증보판)한국 근대 농업사 연구(상): 농업 개혁론·농업 정책』, 일조각, 1984.
  • 송양섭, 「19세기 양역수취법의 변화: 동포제의 성립과 관련하여」, 『한국사연구』 89,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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