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벽(東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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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청에서 관원들이 합좌(合坐)할 때 동쪽에 자리하는 관원.

개설

동벽은 동성(東省)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의정부를 비롯해 홍문관·승정원 소속의 관원들은 함께 자리할 때 서열에 따라 앉는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동벽이란 동쪽에 앉아 서쪽을 향하는 자리로, 의정부의 종1품인 좌·우찬성과 홍문관의 정3품 당하관인 직제학부터 종4품인 부응교까지, 승정원은 좌·우승지가 이에 해당한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관원들이 합좌할 때 앉는 차례를 좌차(座次)라고 하는데, 이는 관료 조직 내에 상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조치였다. 좌차는 관청 내의 서열에 따랐는데, 장관에 해당되는 관원이 북벽(北壁)에 자리하고 그다음 직군이 동벽과 서벽(西壁) 순서로 자리하며, 그다음 하위직은 남쪽의 의자에 앉아 남상(南床)이라 하였다. 북벽은 주벽(主壁)이라고도 하였다.

관원의 좌차 구별은 조선조의 많은 관청 가운데 특히 의정부나 승정원·홍문관 등에서 확인된다. 각 관청별 동벽은 의정부의 경우 좌찬성과 우찬성이 해당하며(『중종실록』 11년 3월 30일), 홍문관은 직제학부터 전한(典翰)·응교(應敎)·부응교 등이, 그리고 승정원의 경우에는 좌승지와 우승지가 역시 동벽에 해당하였다. 이 중 의정부의 동벽은 서벽과 함께 왕이나 왕대비 등에게 올리는 존호(尊號)를 비롯해 왕세자의 자(字), 국상 때의 복제(服制), 배향공신(配享功臣) 등을 의정하는 논의에 참석하였다. 또한 승정원의 경우 원상제(院相制)가 시행될 때에는 재상들이 주벽이 되며, 도승지는 동벽의 첫머리에 앉고 본래 동벽 관원인 좌승지와 우승지가 이어 나란히 자리하였다.

이 같은 좌차는 단순히 합좌할 때 앉는 자리를 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복무규정이나 관원의 인사에도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승정원의 복무규정 가운데 숙직이나 휴가와 관련하여 동벽은 4일마다 한 번씩 숙직하는 반면 동부승지는 연 3일을 숙직하였다. 정식 휴가인 식가(式暇)의 경우도 동벽은 부모·조부모·증조부모·백숙부모·친형제·외조부모·처부모·망처(亡妻)의 기신제를 지낸 뒤 2일간 휴가를 받은 반면 서벽은 부모·조부모·증조부모의 기신제를 지낸 후 바로 출사하도록 하였다.

인사를 할 때도 만약 도승지가 정3품 당상관인데, 좌승지 이하 관원을 2품의 품계를 갖고 있는 관원으로 임용하게 되면 왕에게 보고하여 이를 조정하였다.

변천

관원들의 좌차에 대한 논의는 이미 조선초부터 있었다. 1408년(태종 8) 2월 예조(禮曹)에서는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비롯한 무관직의 좌차를 왕에게 보고한 바 있다. 이때 동벽에는 부마(駙馬)·겸상호군(上護軍) 및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상의 도총제(都摠制)·십사겸상호군(十司兼上護軍)·각 도(道) 절제사(節制使)가 앉도록 규정되었다(『태종실록』 8년 2월 25일).

한편 관청 내 좌차와 품계의 불일치로 인한 혼란과 관련해서는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다. 일례로 1434년(세종 16) 오승(吳陞)이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를 가지고 정2품 관직인 참찬(參贊)의 관직에 제수된 바 있었다. 관행대로라면 참찬은 서벽에 해당하는데, 품계는 동벽에 해당하므로 품계와 실제 관직의 차이로 인해 좌차가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실제 관직을 기준으로 좌차가 결정되었다(『세종실록』 16년 8월 24일). 또한 1513년(중종 8) 8월에는 찬성으로 있던 이손(李蓀)의 경우 품계가 종1품 하계인 숭정대부인 반면 좌참찬홍경주(洪景舟)는 종1품 상계인 숭록대부(崇錄大夫)의 품계를 갖고 있었다. 실직(實職)으로 보면 이손이 동벽에, 홍경주가 서벽에 위치해야 하지만 품계의 상하가 일치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홍경주가 체직(遞職)을 요청하였으나 역시 실제 관직으로 차례가 결정되었다(『중종실록』 8년 8월 20일).

한편 통상적인 관원들의 좌차 구분 이외에도 중국이나 여진족 사신의 접대, 그리고 세자의 대리청정 혹은 입학의(入學儀)를 비롯해 위계가 다른 몇몇 관청의 관원이 모일 때도 좌차가 논의된 바 있다. 여진족을 접견할 때는 도관찰사나 도절제사가 북벽이 되어 남향을 하고 야인이 동서로 나누어 앉았다(『세종실록』 15년 3월 20일). 1435년(세종 17) 4월에는 명나라에 파견된 사신을 진양대군(晉陽大君)이유(李楺) 곧 후일의 세조가 접대하였는데 이때 조선 측에서는 사신을 높여 남향하도록 하였으나 당시 파견된 사신이 본래 조선국 사람이기에 남향할 수 없다고 해서 사신이 동벽에, 대군이 서벽에 자리하였다(『세종실록』 17년 4월 27일). 또한 대리청정하는 세자의 경우는 동벽에 자리하고 신하들은 서벽에 앉아 정사를 집행하였다(『세종실록』 29년 9월 12일).

참고문헌

  • 『육전조례(六典條例)』
  • 『은대조례(銀臺條例)』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