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행복(陵幸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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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이하 수행원들이 왕릉에 참배하기 위하여 오고 가는 길에 착용하는 복식.

개설

국왕과 호위 관원들이 선왕의 능(陵)이나 원(園) 등을 참배하기 위하여 오고 가는 길에 입는 옷의 총칭이다. 능행은 국왕의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흔하지 않은 기회이므로 그 위용이 중요하였기에 참여자들의 능행복은 소홀히 다룰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평상시뿐만 아니라 국상(國喪) 중이나 복중(服中)에 능행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평상시의 능행복과는 다른 차림을 하였다.

국초의 평상시 능행에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배릉의(拜陵儀)」에 보이는 것처럼 국왕의 곤룡포(袞龍袍)와 배종 신하들의 시복(時服)을 착용하였다. 당시의 시복이란 흑단령(黑團領)을 말한다. 그러나 세조대 이후 편의를 쫓아 융복을 착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영조대까지는 국왕은 곤룡포, 혹은 융복(戎服)을 입었고 신하들은 융복을 입었다. 정조는 다른 능행에는 융복을 사용하였으나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에 갈 때만은 사도세자가 생전에 군복(軍服)을 즐겨 입었기 때문에 군복을 능행복으로 착용하였다. 그 후 철종 때는 융복 대신 군복으로 통일하였다.

또한 능행에는 국왕이나 주요 배종관 이외에 호위 관원이나 군사와 같은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동참하는 행사였기에 각자의 역할에 따른 다양한 복식이 등장하였다. 「한양가(漢陽歌)」에는 화성부(華城府) 현륭원 행차 시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병판(兵判)과 각 영문(營門)의 장신(將臣)은 군장(軍裝)하고 각사(各司)의 관원(官員)은 군복과 융복으로 치장하고 각사의 하인들은 능행 복색을 재촉한다고 하였다. 또한 대장(大將)은 안 올린 벙거지에다 상모(象毛)에 공작우(孔雀羽)를 장식하고 비단 군복에 우단 요대(腰帶)를 하고 환도(還刀)와 등채(藤策), 밀부(密符), 병부(兵符)를 차고 동개(筒箇) 등을 갖추고 초관(哨官)은 각 방위색의 더그레를 입었으며 영기(令旗), 순시(巡視), 주장(朱杖) 등을 든 전배(前輩)는 전건(戰巾)을 썼다고 하였다.

연원 및 변천

『국조오례의』의 배릉(拜陵)하는 의주에 따르면, 출궁과 환궁할 때 국왕은 곤룡포를 입고 배종관은 시복(時服)을, 호위 관원과 사금은 군복을 착용하였다. 그러나 1475년(성종 11) 배릉할 때 어가를 호종하는 제신(諸臣)의 복색을 논의하는 중에 세종 때는 예복(禮服)을 착용하였고 세조 때에는 융복을 착용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래서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을 배알할 때도 제신들이 융복을 착용하기로 결정하였다(『성종실록』 6년 9월 8일). 이처럼 조선초기에는 『국조오례의』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국왕 이하 배종관이 예복용 단령(團領), 즉 시복(흑단령)을 착용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세조대 이후 융복을 능행복으로 착용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1510년(중종 5)에는 예행(禮行) 때 백관이 융복으로 따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라는 중종의 문제 제기가 있었다(『중종실록』 5년 3월 8일). 이에 다음 날 신하들은 이미 능행에 융복을 입는 제도는 오래되었으며 교외의 먼 길에 사모를 쓰고 다니기가 불편하고 어가가 초야(草野)에 머무니 배행(陪行)하는 관원들이 융복으로 시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중종실록』 5년 3월 9일). 1528년(중종 23)에는 국왕이 익선관과 강사포 차림으로 능에 갔다는 기록이 보인다(『중종실록』 23년 9월 28일). 여기에서의 강사포란 원유관(遠遊冠)에 착용하는 관복이 아니라 강색 사(紗), 즉 붉은색 비단의 곤룡포를 의미하는 것이다.

1557년(명종 12)에는 명종이 태조의 능인 건원릉(健元陵)과 문종의 능인 현릉(顯陵)에 갈 때 제사를 마친 후 융복을 입고 말을 타고 갔는데, 이에 대하여 사관(史官)은 융복을 입은 일이 옳지 못하다고 지적하였다(『명종실록』 12년 3월 4일).

1729년(영조 5)에는 예조에서 능행복에 대하여 출궁과 환궁은 시사복(視事服)을 입는 것으로 하였으나(『영조실록』 5년 2월 1일) 1748년(영조 24)에 영조가 숙종의 능인 명릉(明陵)에 갈 때는 융복을 갖추었다(『영조실록』 24년 8월 10일). 1777년(정조 1)에는 능행에 융복을 착용하는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고(『정조실록』 1년 6월 6일), 1779년(정조 3) 정조가 효종의 영릉(寧陵)을 참배하는 길에는 융복을 착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정조실록』 3년 8월 3일).

1795년(정조 19)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에 따르면 윤2월 초 9일, 정조는 화성 행차 때 궁궐을 나설 때는 가슴과 등, 좌우 어깨에 용보를 장식한 곤룡철릭을 입었다. 노량주교에 이르러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출발할 때 정조는 군복으로 갈아입었고, 12일에 화성행궁에서 현륭원에 거둥할 때도 역시 군복을 착용하였다. 이처럼 정조는 능행복으로 융복과 함께 군복을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배종하는 신하들 역시, 군복과 융복을 착용하였다. 1873년(고종 10) 8월 29일 기사를 통해 보면, 정조 때 화성으로 행행할 때 입기 시작한 군복은 1846년(헌종 12)까지는 화성으로 행행할 때만 사용되었다(『고종실록』 10년 8월 29일). 1860년(철종 11) 이후로는 간편함을 쫓아 군복으로 능행복을 단일화하였다.

이처럼 조선초기 능행에는 곤룡포와 시복을 착용하였으나 세조대 이후 점차 융복을 착용하게 됨에 따라 국왕은 곤룡포, 신하들은 융복으로, 다시 영조대에는 국왕과 신하 모두 융복으로, 정조대는 현륭원에서만 융복과 군복을, 19세기 철종대 이후는 군복만을 능행복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형태

조선초기의 능행에 국왕은 곤룡포 차림을, 배종 관원은 시복 차림을 하였으니, 곤룡포나 시복는 모두 동일한 형태의 단령이다. 단령이란 깃이 둥글고 허리 아래로 길게 옆트임이 있는 관복으로 고려말 정몽주(鄭夢周)가 명나라로부터 받아온 것으로, 옷길이나 깃의 깊이나 너비, 허리선의 길이, 소매통의 너비와 길이, 그리고 무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약간씩 변화하였다.

조선초기의 곤룡포는 얕게 파인 둥근 깃에 넓지 않은 소매가 달렸으며 길이는 발목을 덮을 정도로 긴 옷이었다. 그리고 허리선 아래로는 긴 옆트임이 있는데, 트임에는 옷감 한 폭 정도를 접어 만든 커다란 무(武)가 달렸다. 무는 세조대까지 두 가지 양식이 존재하였다. 초기에는 고려말 불복장물 중 답호 등에서 볼 수 있는 다중 안주름형이 사용되었는데, 세종대 말기 이후 대소 안팎주름형으로 변화되었다.

1444년(세종 26) 명나라에서 국왕의 면복 일습과 곤룡포 일습을 보내왔다. 다홍색 사(紗)와 라(羅), 저사(紵絲)로 만든 곤룡포 세 점과 함께 그 안에 입는 청색 답호와 흑록·앵가록 등의 초록색 철릭을 보내왔다(『세종실록』 26년 3월 26일). 국왕의 곤룡포와 받침옷의 다홍과 청색, 초록색의 배색은 왕조의 끝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신하들의 시복 형태는 곤룡포와 같았다. 단지 색상에는 차이가 있었는데 초기에는 잡색을 사용하였으나 이후 아청색의 단령, 즉 흑단령을 예복으로 삼게 되면서 능행복에 사용된 단령은 흑단령이었다. 1454년(단종 2) 이후, 당상관 이상이 단령에 흉배를 사용하면서 당상관 이상은 흉배 달린 흑단령을 착용하고 당하관은 흉배 없는 흑단령을 사용하였다.

세조대 이후 능행복은 융복으로 바뀌었다. 융복은 갓[笠子, 絲笠]에 철릭(帖裏, 帖裡, 天益, 天翼), 흑화자(黑靴子), 그리고 광대(廣帶), 전대(戰帶) 등으로 구성된다. 국왕의 융복은 마미두면(馬尾頭冕), 즉 흑립(黑笠)에 오조룡보가 가슴과 등, 양 어깨에 장식된 다홍색 철릭인데 철릭은 상의와 치마가 연결된 옷이다. 배종하는 신하들의 융복은 남색과 홍색인데 영조대의 『속대전(續大典)』에 따르면 당상관은 패영(貝纓) 장식의 자립(紫笠)에 남색 철릭을 입고 당하관은 정영(晶纓) 장식의 흑립에 홍색 철릭을 입었다. 1842년(헌종 8)에는 당하관의 융복 색상을 잠시 청색으로 변통하였으나 다시 홍색 철릭으로 변경하였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한양가(漢陽歌)」
  • 宋賢珠,「수원능행도(水原陵行圖)」,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편(1982), 『韓國의 服飾』, 1982.
  • 李恩珠, 「16세기 전기 단령의 구성법 일례」, 『服飾文化硏究』6(2),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