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金琜)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김래 |
한글표제 | 김래 |
한자표제 | 金琜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광해군 |
집필자 | 이현숙 |
자 | 자옥(子玉)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76년(선조 9) |
사망 | 1613년(광해군 5) 6월 |
본관 | 연안(延安)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강원도 원주(原州) 안창리(安昌里)의 사향원(巳向原) |
증조부 | 김안도(金安道) |
조부 | 김오(金◎示+吳) |
부 | 김제남(金悌男) |
모_외조 | 광주 노씨(光州盧氏) : 노계(盧洎)의 딸 |
형제 | (동생)김규(金珪), 김선(金瑄) (누이)심정세(沈挺世)의 처, 인목대비(仁穆大妃) |
처_장인 | 초계 정씨(草溪鄭氏) : 정수묵(鄭守黙)의 딸 →(자녀)2남 3녀 |
자녀 | (1자)김천석(金天錫) (2자)김군석(金君錫) (1녀)김광찬(金光燦)의 처 (2녀)최극량(崔克良)의 처 (3녀)이후연(李後淵)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김래(金琜)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40년 8월 1일, 『선조실록』 40년 9월 24일, 『광해군일기』 즉위년 9월 17일, 『광해군일기』 2년 10월 24일, 『광해군일기』 5년 5월 6일, 『광해군일기』 5년 5월 13일, 『광해군일기』 5년 5월 23일, 『광해군일기』 5년 5월 23일, 『광해군일기』 5년 6월 1일, 『광해군일기』 5년 6월 1일 |
총론
[1576년(선조 9)∼1613년(광해군 5) = 38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 공조 좌랑(佐郞)과 청주목사(淸州牧使) 등을 지냈다. 자는 자옥(子玉)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돈녕부(敦寧府) 영사(領事)연흥대원군(延興府院君)김제남(金悌男)이고, 어머니 광주 노씨(光州盧氏)는 노계(盧洎)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정(司正)을 지낸 김오(金◎示+吳)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현령(縣令)을 지낸 김안도(金安道)이다. 선조의 계비(繼妃)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오라버니다.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아버지 김제남과 동생 김규(金珪)·김선(金瑄)과 함께 모두 화(禍)를 당하였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606년(선조 39)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1세였다.[『방목(榜目)』] 선조의 계비가 된 누이 인목왕후가 그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아서, 집안의 권세가 더욱 높아졌다.
처음에는 사포서(司圃署)별제(別提)에 보임되었다가,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부솔(副率)을 거쳐 세자익위사 위솔(衛率)로 옮겼는데, 이때 세자이던 광해군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광해군의 난폭한 성격을 알게 되었다. 군기시(軍器寺)주부(主簿)를 거쳐, 공조 좌랑이 되고, 의빈부(儀賓府)도사(都事)와 세자익위사 익위(翊衛)로 승진하였다. 1607년(선조 40) 외직으로 나가 용강현령(龍崗縣令)이 되었다가, 진위현령(振威縣令)을 거쳐 김포현령(金浦縣令)으로 옮겼다.(『선조실록』 40년 8월 1일),[『청음집(淸陰集)』 권13 「증좌승지행청주목사김공묘갈명(贈左承旨行淸州牧使金公墓碣銘)」 이하 「김래묘갈명」으로 약칭] 이어 안산군수(安山郡守)로 승진하였으나,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자, 아버지 김제남과 함께 누이 인목대비와 조카 영창대군의 앞날 때문에 몹시 불안해하였다.(『선조실록』 40년 9월 24일)
1608년 2월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이 정권을 잡고, 인목대비의 오라버니라고 하여 부평부사(富平府使)로 승진 임명하였으나, 김래(金琜)는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몸을 조심하였다.(『광해군일기』 즉위년 9월 17일) 1610년(광해군 2) 다시 청주목사에 바꾸어 임명하였으므로, 김래는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목사를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광해군일기』 2년 10월 24일) 1613년(광해군 5) 다시 안악군수(安岳郡守)에 임명하였으므로 하는 수 없이 부임하였는데, 관소(官所)에 도착한 지 10일이 채 못 되어 계축옥사가 일어나는 바람에 서울로 압송되었다.(『광해군일기』 5년 5월 6일),[「김래묘갈명」] 이이첨은 조령(鳥嶺)에서 은화 7백 냥을 도적질한 혐의를 받던 ‘강변(江邊) 7우(友)’의 박응서(朴應犀)를 사주하여, 김제남이 그 은화를 자금으로 외손자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하였다고 무고하게 하여,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모반대역죄로 제거하려고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국문(鞠問)을 당할 때 김래는 두 아우 김규·김선과 함께 아버지 김제남의 모반 사실을 극구 부인하였는데, 김래는 장형(杖刑)을 맞고 압슬형을 받다가 막냇동생 김선과 함께 옥중에서 죽었다.(『광해군일기』 5년 5월 13일),(『광해군일기』 5년 5월 23일),(『광해군일기』 5년 5월 23일),(『광해군일기』 5년 6월 1일) 그해 6월 10일 아버지 김제남도 끝내 모반대역죄로 처형당하였다. 그때 김래의 나이는 38세였다. 동생 김규는 옥중에서 목숨이 붙어 있었으나, 아버지가 처형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6월 15일 옥중에서 자결하였다. 1614년(광해군 6)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유배되어 죽음을 당하였고, 인목대비는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
성품과 일화
김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은 인자하고 온순하며 말수가 적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공손히 가법(家法)을 지켰다. 아버지 김제남이 일찍이 사람들에게 자랑하기를, “이 아이가 조상에게 욕을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 점은 내가 도저히 당할 수가 없다” 하였다. 1602년(선조 35) 누이가 선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인목왕후로 책봉되었는데, 1606년(선조 39) 23세의 인목왕후가 영창 대군을 낳자, 친척들이 모두 국구 김제남의 집을 찾아와서 축하하였다. 그러나 김래는 유독 걱정하는 빛을 띠면서 가만히 아버지에서 말씀드리기를, “장차 광해군이 즉위하면, 집안에 큰 화가 미칠 수도 있습니다”라고 하고, 앞날을 걱정하였다. 2년이 지나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고, 5년이 지나서 계축옥사가 일어났는데, 과연 그의 말이 그대로 들어맞았던 것이다.[「김래묘갈명」]
1608년(광해군 즉위년) 부평부사로 있을 때 목릉(穆陵 : 선조의 왕릉)의 복토(復土)를 겨우 끝내자마자, 곧바로 중국칙사(勅使)의 행차가 있었는데, 경기 지방이 유난히 피폐하고 민력은 크게 위축되어 그 경비를 감당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리하여 칙사 대접에 반드시 없어서는 안 되는 물품들 중에서 민간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은 부사가 대부분 사비를 들여 경상(京商)에서 사서 공급하여 칙사를 잘 대접하여 보내니, 부평 고을 백성들이 이로 인해 살아나게 되었다. 그러나 부사김래는 스스로 그러한 사실을 드러내어 남에게 밝히지 않았으므로, 끝내 아무도 이를 알지 못하였다.[「김래묘갈명」]
1610년(광해군 2)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부역(賦役)을 균일하게 하고, 형옥을 공정하게 하여, 정사(政事)를 잘 돌보자, 청주의 백성들이 기쁜 마음으로 젊은 목사에게 복종하였다. 그 뒤에 감옥의 죄수들이 탈출한 일이 있었는데, 나라의 법령에 기한 내에 탈출한 죄수들을 잡아들이지 못하면 그 고을 수령이 대신 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백성들이 그 말을 듣고 분주히 탈출한 죄수를 염탐하고 의심스러운 사람을 고발하여, 탈출한 죄수들을 모두 기한 내에 잡아들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묘소와 후손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 때 김래가 국문을 받다가 막냇동생 김선과 함께 옥중에서 죽자, 처음에 집안사람들이 김래와 김선의 시신을 경기도 고양(高陽)의 선영에 묻었다. 그 뒤에 10년이 지나서 1623년(인조 1) 서인(西人)의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대왕대비에 복귀한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김래·김규·김선 3형제의 작위를 회복하고, 인조에게 부탁하여 나라에서 아버지 김제남과 김래·김선 형제를 모두 강원도 원주(原州) 안창리(安昌里)의 사향원(巳向原)에 옮겨 묻었는데, 3부자의 무덤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또 인조가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에게 명하여 김래의 묘갈명(墓碣銘)을 짓게 하여, 그 무덤 앞에 세웠다.[「김래묘갈명」]
부인 초계 정씨(草溪鄭氏)는 군수(郡守)정수묵(鄭守默)의 딸인데, 자녀는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김천석(金天錫)은 돈녕부 참봉(參奉)을 지냈고, 차남 김군석(金君錫)은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를 지냈다. 계축옥사 때 김제남의 아들 세 명과 사위 한 명이 모두 곤장 아래에서 죽었다. 그때 김래의 아들들은 어렸는데, 큰 아들 김천석은 할머니와 함께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나, 둘째아들은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둘째아들을 귀양 보내려고 자주 뒷조사를 하였으므로, 김래의 부인 초계 정씨는 은밀히 그의 둘째아들을 중에게 맡겨서 절의 상좌(上座)로 만들었다. 그리고 병에 걸려 죽었다고 하면서 장사를 치렀으므로, 집안사람 중에서 이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인조반정 뒤에 둘째아들 김군석은 환속하였다.(『광해군일기』 5년 6월 1일)
장녀는 김광찬(金光燦)에게, 차녀는 최극량(崔克良)에게, 3녀는 이후연(李後淵)에게 출가하였다.[「김래묘갈명」] 맏딸은 좌의정김상헌의 양자 김광찬에게 시집가서 영의정김수항(金壽恒)을 낳았는데, 김수항의 아들 김창집(金昌集)·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김창업(金昌業) 4형제가 모두 정승으로 출세하여, 그 후손들이 순조(純祖)·헌종(憲宗)·철종(哲宗) 때 60여 년 동안 나라의 권력을 독점하면서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도 정치가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청음집(淸陰集)』
- 『농암집(農巖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월사집(月沙集)』
- 『일사기문(逸史記聞)』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 『곡운집(谷雲集)』
- 『퇴우당집(退憂堂集)』
- 『문곡집(文谷集)』
- 『일사기문(逸史記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