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형(權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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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1년(중종36)∼1605년(선조38) = 65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중오(仲悟)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권근(權近)의 8대손이며 태종의 부마(駙馬) 권규(權跬)의 후손이다. 권침(權琛)의 아들이며 첨사(僉使)권길(權吉)의 숙부이고, 김석보(金碩輔)의 외손자이며 변훈남(卞勳男)의 사위이다.

진사로서 관계 진출

18세이던 1558년(명종13) 진사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이름을 날리자, 목청전(穆淸殿)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그 뒤 선원전(璿源殿) · 연은전(延恩殿)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사옹원(司饔院)봉사(奉事)에 올랐다.

1592년(선조25) 의영고(義盈庫)로 전직되었고,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으로 옮겼다가, 통례원(通禮院)인의(引儀)에 임명되었다. 은산현감(殷山縣監)으로 나가서 3년 동안 지내다가, 공조 좌랑 · 형조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옥천군수(沃川郡守)로 나갔다가, 공조 정랑으로 승진하였고, 평시서(平市署)영(令), 장례원(掌隷院) 사의(司議),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익찬(翊贊) 등을 역임하였다. 또 외직으로 봉산군수(鳳山郡守)와 신천군수(信川郡守)를 역임하였는데,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6품 좌랑과 5품 정랑을 지내고 청요직(淸要職)으로 승진하지 못한 채, 외방의 군수(郡守)로 다녔다.

[만년의 대과 급제

59세이던 1599년(선조32) 문과에 합격하자 과거 급제를 바라던 노모가 매우 기뻐하였다. 문과에 합격했는데도 용강현령(龍江縣令) · 보성군수(寶城郡守)로서 외방으로 나갔지만 곧 예조 정랑 · 성균관 전적(典籍) · 사재감(司宰監)첨정(僉正)에 임명되어 중앙으로 돌아왔다. 1604년(선조37)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발탁되어, 성균관 직강(直講) · 사복시 첨정으로 승진되어, 춘추관 편수관(編修官)을 겸임하여 노년에 겨우 청요직에 오를 수가 있었다. 그 뒤, 장악원(掌樂院) 첨정 · 사재감 첨정 · 사복시(司僕寺) 첨정을 역임하였다. 1605년(선조38) 정평부사(定平府使)에 임명되었다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이 되었고, 예빈시(禮賓寺) 부정(副正)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만년에 과거에 급제하는 바람에 3품 당상관(堂上官)에 진출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무덤과 추모

묘소는 경기도 금천(衿川) 일직리(一直里) 선산(先山)에 있으며,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청음집(清陰集)』 권30) 죽은 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朝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청음집(清陰集)』
  • 『계갑일록(癸甲日錄)』
  • 『초간집(草澗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성호전서(星湖全書)』
  • 『번암집(樊巖集)』
  • 『밀암집(密巖集)』
  • 『식산집(息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