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기(具仁墍)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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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구인기 |
한글표제 | 구인기 |
한자표제 | 具仁墍 |
분야 | 왕족/외척, 정치·행정가/관료/무신, 정치·행정가/공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조~현종 |
집필자 | 최양규 |
자 | 계의(季依) |
봉작 | 능풍군(綾豐君), 능풍부원군(綾豐府院君) |
시호 | 충간(忠簡)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97년(선조30) |
사망 | 1676년(숙종2) |
본관 | 능성(綾城)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양주(楊州) 군장리(群場里)의 선영(先塋) |
증조부 | 구순(具淳) |
조부 | 구사맹(具思孟) |
부 | 구굉(具宏) |
형제 | 구인전(具仁廛), 구인서(具仁墅), 구인자(具仁垐) (누이)이입신(李立身)의 처, 유구(柳䪷)의 처 |
처_장인 | (첫째부인)민씨(閔氏): 민헌(閔憲)의 딸→(자녀)1남 (둘째부인)최씨(崔氏) |
자녀 | 구일(具鎰) |
유명자손 | 구수정(具守禎), 구지정(具志禎), 구상정(具尙禎)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구인기(具仁墍) |
총론
[1597년(선조30)~1676년(숙종2) = 80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숙종(肅宗) 때 활동한 무신.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한 3등 정사공신(靖社功臣). 자는 계의(季依)이고, 본관은 능성(綾城)인데, 구사맹(具思孟)의 제 4자 구굉(具宏)의 아들이다. 구사맹의 제 5녀가 인조(仁祖)의 어머니 인헌왕후(仁獻王后)이므로, 구인기는 인조의 외사촌 동생이다. 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함께 백부 능해군(綾海君)구성(具宬)에게 수학하였다.
인조반정의 현장
구인기와 인조는 두 살 차이인데, 어릴 적부터 서로 친분이 두터워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광해군(光海君)이 점쟁이 말을 믿고 인조의 동생 능창군(綾昌君)이전(李佺)을 죽였을 때 친척들은 무서워하여 아무도 감히 그 집 문앞을 다니지 못하였다. 그러나 구인기만은 평상시와 같이 왕래하면서 상장(喪葬)을 치르고 제사를 지내 주니, 인조가 그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였다. 광해군의 정사가 더욱 어지러워지자, 아버지 구굉이 구인후(具仁垕)·신경진(申景禛) 등과 함께 반정(反正)을 계획하였는데, 구인기는 항상 측근에서 그들을 도왔다. 1623년 3월 반정할 때 여러 사람들이 먼저 창덕궁(昌德宮)으로 쳐들어가서 광해군을 몰아내자, 구인기는 인조를 모시고 연서역(延曙驛)에서부터 단문(端門)을 통해 입궐하여 즉위(卽位)하게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활동
인조반정 이후에 구인기는 정사공신(靖社功臣) 제 3등으로 책봉되었다. 사헌부(司憲府)감찰(監察)로 임명되었고, 이어 군자감(軍資監)판관(判官)으로 옮겼다가, 충훈부(忠勳府)도사(都事)를 거쳐 선공감(繕工監)첨정(僉正)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군기시(軍器寺)부정(副正)·홍천현감(洪川縣監)·김제군수(金堤郡守)로 옮겼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1640년(인조18)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로서 청(淸)나라 심양(瀋陽)의 세자 질자관(質子館)에 갔다가 돌아와 담양부사(潭陽府使)가 되었다. 그리고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상복을 입은 다음에 수원부사(水原府使)로 임명되었고, 그 뒤 회맹제(會盟祭)에 참석하여 능풍군(綾豐君)에 봉해졌다.
효종(孝宗) 때 경기도수사(京畿道水使)를 거쳐 전라도병사(全羅道兵使)와 충청도병사(忠淸道兵使)에 임명되었다.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부총관(副摠管)·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1655년(효종6) 총융사(摠戎使) 등을 역임하였다. 현종(顯宗) 때 공조판서에 특별히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70세가 넘었다고 하여 벼슬에서 스스로 물러나 한가하게 지냈다. 1674년(현종15) 돈령부(敦寧府)판사(判事)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능풍부원군(綾豊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정1품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1676년(숙종2) 4월 9일 병으로 죽으니, 향년 80세였다.
성품과 일화
구인기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대로 아무런 꾸밈과 거짓이 없이 살았고, 겉으로 남에게 드러내는 것을 아주 싫어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로 오랑캐에게 당한 일을 내심 분통하게 여겨서, 심양(瀋陽)에 있을 때는 우리나라 볼모들이 묵고 있는 관사(館舍)의 문 밖으로 일체 발을 내디디지 않았으며, 또 그 곳에 소속된 물건을 자신의 몸에 절대 가까이 하지 않았다. 벼슬에 임해서는 청렴하고 대범하였으며, 자애롭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므로, 군민(軍民)들의 마음을 많이 샀다. 그리하여 그가 떠난 후에는 반드시 송덕비(頌德碑)를 세워서 그 업적을 칭송하였다. 또 집에서는 진귀한 보물이나 애완물을 좋아하지 않았고,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더라도 세수하고 머리 빗는 일을 빼놓지 않았다. 공신(功臣)에 관한 규정에 따라 조정에서 품계(品階)와 벼슬을 내려주어도 크게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또 동기(同氣)가 비록 천얼(賤孼)이라고 하더라도 불쌍하게 여겨 도와주며 차등 없이 대하였다. 그러므로 평생 동안 그를 원망, 시기, 질투하거나 미워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묘소와 추증
숙종 때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내려주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군장리(群場里) 선영(先塋)에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택당집(澤堂集)』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동계집(桐溪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사계전서(沙溪全書)』
- 『서계집(西溪集)』
- 『송자대전(宋子大典)』
- 『잠곡유고(潛谷遺稿)』
- 『청음집(淸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