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희(廣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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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연산군 말기인 1504년부터 1506년까지 음악 연주를 담당한 음악 전문인 또는 그 집단을 가리키는 명칭.

개설

조선 왕실의 음악 연주는 악공(樂工)악생(樂生)이 주로 담당하였다. 악공은 장악원 우방(右坊)에 속하여 향악(鄕樂)당악(唐樂) 등의 속악(俗樂)을 잔치에서 연주하고, 악생은 좌방(左坊)에 속하여 아악(雅樂)을 제사와 회례연에서 연주하였다. 그런데 연산군은 1504년(연산군 10)에 악공과 악생의 구분 없이 모두 광희(廣熙)로 고쳐 부르게 하였으며(『연산군일기』 10년 12월 23일),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과 연주자를 광희악(廣熙樂)이라고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여러 의식(儀式)에 따르는 음악과 무용은 장악원에 소속된 악공·악생·관현맹(管絃盲)·여악(女樂)·무동(舞童)·가동(歌童) 등이 담당하였다. 그중 악공은 장악원 우방에 속하여 주로 연향(宴享) 때 향악과 당악을 연주하였고, 악생은 좌방에 소속되어 제례 의식 때 아악의 연주를 담당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악공은 공천(公賤)으로 충원하였으나 양인(良人) 가운데 스스로 원하는 자는 악공이 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악생은 양인만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악생이 악공보다 지위가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504년에 연산군은 장악원의 악공과 악생을 구분 없이 모두 광희로 부르게 하고, 1,000명의 연주자를 두게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12월 30일). 또한 연주 실력에 따라 1등에서 3등까지 세 단계로 나누어 각각의 등위에 맞는 1등악, 2등악, 3등악을 연주하거나 합주하도록 했는데, 모두 전교(傳敎)를 받아서 시행하도록 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3월 12일).

광희는 음악 연주가 주요 직무였으나 처용무를 담당하기도 했으며, 광희악 여산(余山)은 연산군과 짝을 지어 내정에서 춤을 추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11월 3일). 한편 음악을 담당한 광희가 창기(娼妓)인 운평 등과 서로 대화하거나 왕래하지 못하도록 검열과 단속이 지속적으로 시행되었으며, 급기야는 ‘광희악’이라는 명패를 착용하고 다니게 하였다. 명패의 한쪽 면에는 성명과 생년, 형체, 수염의 유무, 기능의 등급을 새기고, 다른 면에는 광희악 세 글자를 새기도록 하였다(『연산군일기』 12년 2월 27일).

1505년(연산군 11)에는 광희악의 체아직(遞兒職)으로, 정5품 협궁(協宮) 1명, 종5품 부협궁(副協宮) 1명, 정6품 해상(諧商) 1명, 종6품 부해상 3명, 정7품 화각(和角) 1명, 종7품 부화각 1명, 정8품 균치(均徵) 1명, 종8품 부균치 3명, 정9품 제우(齊羽) 8명, 종9품 부제우 14명을 더 두게 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3월 11일).

변천

‘광희’는 1504년 12월 22일에 어서(御書)를 통해 처음 이름이 지어졌고, 이튿날 전교로써 확정되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악생이 297명, 악공이 518명으로 총 815명이 장악원에서 활동하였는데, 1504년 12월 24일에 그 수를 증원하도록 명령한 결과, 12월 30일에는 1000명으로 늘어났다. 그 뒤 1505년 9월 30일에는 장악원을 연방원(聯芳院)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장악원은 기존의 제도를 회복하였다(『중종실록』 1년 9월 3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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