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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군 사가정 (達城君 四佳亭) 가계도)
(달성군 사가정 (達城君 四佳亭)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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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7일 (수) 09:13 판

徐居正. 1420(세종 2) ~ 1488(성종 19)


달성군 사가정 (達城君 四佳亭) 가계도

  • 증조부 : 서익진(徐益進)
    • 조 부 : 서의(徐義)
      • 부  : 서미성(徐彌性)
      • 모  : 권근(權近)의 딸
        • 형  : 서거광 현감
        • 정경부인 선산김씨 (부:김여회金如晦)
        • 정경부인 공주이씨 (부:이영근李寧根)

개요

조선 전기의 훈구파 문신. 15세기 관학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시인 겸 문장가로 꼽힌다. 호는 사가정(四佳亭).[* 서울 지하철 7호선 사가정역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 서씨 시조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2]]

가족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대부.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조할아버지: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큰증조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 큰아버지 : 서문한(徐文翰 현감)
                          • 삼촌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
                          • 삼촌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
                            • 조카: 서지원(徐智元 학자)
                              • 증조카: 서윤(徐尹 참봉(參奉))
                              • 증조카: 서괄(徐适 훈도(訓導))
                              • 증조카: 서세(徐洗찰방(察訪))
                              • 증조카: 서부(徐浮 목사(牧使))
                            • 조카: 서인원(徐仁元 목사)
                            • 조카: [[서용원(조선)|서용원(徐勇元 생원)
                            • 조카: 서숙원(徐叔元 생원)
                          • 삼촌 : 서섭(徐涉. 판서공파(判書公派)
                        • 큰아버지 : 서문간(徐文幹 현감)
                          • 삼촌 : 서근중(徐近中, 감찰공파(監察公派)
                        • 큰아버지 :서문덕(徐文德 현감)
                      • 큰할아버지 : 서습(徐漝 생원)
                      • 큰할아버지 : 서환(徐渙 생원)
                    • 증조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할아버지: 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아버지: 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
                          • 형: 서거광(徐居廣 언양현감)
                          • 본인: 서거정(徐居正 좌찬성 종1품)
                            • 아들(서자(庶子): 서복경(徐福慶)(군수.사가공파(四佳公派)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

내용

본디 수양대군의 오른팔 중 하나[* 김시습도 서거정은 배신자이니 뭐니 비난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서거정은 과거급제 이전 나이 20대초부터 수양대군과 친하게 지내고 수양대군과 같이 24살 젊은 나이로 명나라로 다녀오는 비서직을 맡았을 정도로 처음부터 수양대군 밑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명나라로 가던 길에 서거정은 갑자기 깨어나 울었는데 꿈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사옵니다라고 간청하여 조선으로 돌아와 진짜로 죽은 어머니 장례에 참가했다는 야사도 있다.]로,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후 당시 사명(辭命: 왕명을 전달하는 외교문서)의 대부분을 전담한 인물이다. 세조 때에는 공조참의ㆍ예조참의ㆍ이조참의ㆍ형조참판ㆍ예조참판ㆍ형조판서ㆍ성균관지사ㆍ예문관대제학 등 주요 관직을 연이어 제수하기도 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경국대전(經國大典),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문선(東文選), 동국통감(東國通鑑), 오행총괄(五行摠括), 동인시화(東人詩話),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필원잡기(筆苑雜記), 사가집(四佳集), 역대연표(歷代年表), 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言解), 동인시문(東人詩文), 향약집성방언해(鄕藥集成方言解), 마의서(馬醫書), 유합(類合) 등이 있다. 법전ㆍ역사ㆍ지리ㆍ문학 등의 분야에 걸쳐서 활약했다고 할 수 있다.

1488년(성종 19) 향년 69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때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받았다.

서거정의 역사 의식은 당대 정치권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는데 먼저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동국통감(東國通鑑)』에 실린 서거정의 서문과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는 이른바 삼국균적(三國均敵)을 내세우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서문에서는 우리나라가 단군(檀君)이 조국(肇國: 처음 나라를 세움)하고, 기자(箕子)가 수봉(受封: 봉토를 받음)한 이래로 삼국·고려시대에 넓은 강역을 차지했음을 자랑하고 있으며 이러한 영토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 전통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중국의 『방여승람(方輿勝覽)』이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와 맞먹는 우리나라 독자적 지리지로서 편찬하였음을 내세웠다.

『동문선(東文選)』에서는 중국과 다른 우리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담았음을 표방했다.

이와 같이 서거정이 주동해 편찬된 사서·지리지·문학서 등은 전반적으로 한국의 독자성과 위대함을 알리는 쪽에 치중하였으나 훗날 성종의 왕명에 따라 사림파 인사의 참여 하에 내용들이 개찬되었다. 많은 문화적 업적을 남겼지만, 말년에는 대거 등용된 사림들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투합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성종대에 등용된 사림들이 작성한 실록에는 대단히 부정적인 소인배로 묘사되었다.

>조정에서는 가장 선진(先進)인데, 명망이 자기보다 뒤에 있는 자가 종종 정승의 자리에 뛰어오르면, 서거정이 치우친 마음이 없지 아니하였다. 서거정에게 명하여 후생(後生)들과 더불어 같이 시문을 지어 올리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서거정이 불평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자격이 없을지라도 사문(斯文)의 맹주로 있은 지 30여 년인데, 입에 젖내 나는 소생(小生)과 더불어 재주 겨루기를 마음으로 달게 여기겠는가? 조정이 여기에 체통을 잃었다.”하였다. 서거정은 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하는 양(量)이 없고, 또 일찍이 후생을 장려해 기른 것이 없으니, 세상에서 그를 작게 여겼다. >성종실록 1488년(성종 19) 12월 24일

15세기 훈구파가 점차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16세기 사림파의 시대가 열리는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구라고 할 수 있다.

서거정이 인재배출 물꼬 튼 지 100년 후…대구 유학 르네상스 시대 열려

대구를 대표하는 인재 서거정을 배향하고 있는 대구 북구 산격동 구암서원. 서거정은 달성을 세거지로 한 대구 서씨로, 외가인 경기도 임진현에서 태어났지만 항상 자신의 뿌리가 있는 대구를 ‘내 고향’이라 부르며 특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대구시 수성구 파동에 있는 옥산전씨 집안 재실 무동재(왼쪽). 대구 최초의 서원인 연경서원 건립을 주도한 전경창을 모시고 있다. 오른쪽 비석은 전경창의 뜻을 기리는 유허비다.

대구는 ‘인재의 요람’이다. 특히 조선시대 들어 역사의 중심에 선 걸출한 인물들이 대구에서 배출됐다. 조선 전기 최고의 문장가로 명성을 떨친 서거정(徐居正)을 비롯해 1458년 문과 알성시에서 장원급제한 도하(都夏), ‘문무를 겸비한 호걸’ 양희지(楊熙止)가 대표적인 조선 전기의 인재들이다. 16세기 조선 중기에는 연경서원이 건립되면서 수많은 인재가 배출됐다. 당시 연경서원 건립을 주도한 전경창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대구 성리학의 스승’으로 불릴 만큼 명성이 높았다. 특히 전경창은 채응린, 정사철과 함께 ‘대구 유학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기도 했다. 연경서원 건립과 비슷한 시기에 한강 정구가 대구에 정착하면서 학문 연구의 열기는 더욱 활기를 띠었고, 대구는 인재의 고장으로 발돋움했다.

인재 배출의 물꼬를 튼 조선 최고 문장가 서거정

대구를 상징하는 인재를 꼽으라면 서거정(徐居正, 1420~88)을 빼놓을 수 없다. 서거정은 달성을 세거지로 한 대구 서씨로, 조선 전기 최고의 문장가로 명성을 떨쳤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여섯 살에는 이미 시를 짓기 시작해 장안에 회자되기도 했다.


조선전기 최고 문장가 서거정 4번의 대과 등재된 ‘천재 중의 천재’ 세종∼성종 45년간 조정서 중책 맡아 도하 등 과거급제 지역인재 적극 후원 대구에 대한 각별한 정, 詩로도 남겨

지방 교육의 시대 연 전경창 이황의 제자이자 대구 성리학 스승 인재양성 산실 연경서원 건립 주도

후학 양성에 힘쓴 한강 정구 전경창과 뜻 함께해 연경서원서 강학 손처눌 등 제자들과 ‘한강학파’ 이뤄 대구가 인재 요람으로 발돋움하게 돼


과거시험 이력도 화려하다. 서거정은 약관 19세 되던 1438년(세종 20)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5세 되던 1444년(세종 26) 문과 식년시(式年試)에서 을과(乙科) 3위를 차지해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1457년(세조 3) 문과 중시(重試, 일종의 승진시험), 1466년(세조 12) 문과 발영시(拔英試, 중신·문무백관에게 임시로 실시한 과거), 1466년 문과 등준시(登俊試, 현직 관리들의 문풍 진작을 위해 실시한 과거)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네 번의 대과에 등재된 ‘천재 중의 천재’였다. 특히 그는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섬기며 45년 동안 조정에 머물며 중책을 맡았다. 오랜 기간 대제학으로 있으면서 당대 문단을 주도했고, 국가 편찬 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경국대전’ ‘삼국사절요’ ‘동문선’ 등 주요 서적의 서문을 작성한 ‘서문 전문가’로 명성이 자자했다.

무엇보다 서거정은 외가인 경기도 임진현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항상 자신의 뿌리가 있는 대구를 ‘내 고향’이라 부르며 특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지역 출신 관료들의 서울 집회소인 대구 경재소(京在所)의 책임자인 당상(堂上)을 맡아 상경하는 지역 인사들과 자주 교류하기도 했다. 이때 대구 소식을 접하며 지역 현안을 논의했다. 하지만 그런 서거정에게도 큰 걱정이 하나 있었다. 그는 ‘고향 대구’ 출신의 과거 합격자가 나오지 않는 것이 늘 안타깝고 아쉬웠다. 실제 1444년(세종 26) 서거정이 문과에 합격한 후 10여년 동안 급제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고향 출신 인재를 중용하고 싶었던 서거정에게 이 문제는 늘 고민이었다.

그러던 중 1458년(세조 4) 대구 출신 도하(都夏)가 문과 알성시(謁聖試)에서 장원급제하면서 맺혔던 한을 다소 풀 수 있었다. 서거정은 그해 금의환향하는 도하에게 ‘장원 도하가 환향하는 것을 보내는 시의 서’를 지어 고향 후배를 아끼는 애틋한 정을 드러냈다.

“‘내 고향’ 대구는 경상도의 큰 고을이다. 산천의 서린 기운으로 보아 마땅히 영재가 많이 배출될 만한데도 어찌 된 일로 수십년 동안 문헌이 조락하고 풍속이 투박해 문인재사(文人才士)가 단 한 명도 배출되지 않았단 말인가? … 금년(1458년) 7월 도군은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고 또 장원급제하여 명성이 자자했다. 지금 행차에 도군은 찬란히 빛나는 비단옷을 입고 옥으로 된 관을 쓰고 먼저 조상의 묘소를 배알하여, 조정의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효리(孝理)를 중히 여기는 아름다운 뜻을 선양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축하 자리를 마련해 친척 부로(父老)들과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면 고을 사람들이 모두 와서 보고 감동해 문교를 좇아 ‘기필코 도군처럼 되고야 말겠다’라고 다짐할 것이니, 아! 이 사람은 ‘내 고향’의 구양첨(歐陽詹)이 아닌가?”

이후 서거정은 도하를 적극 후원했다. 그가 사간원 우사간으로 재직할 당시 도하를 우정언으로 추천해 같은 부서에 근무하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도하의 장원급제 후 대구 출신 인재들은 나름대로 두각을 나타냈다. 10여년 동안 대구 출신 소과 합격자들이 수없이 배출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출사의 길인 대과(문과) 합격자는 여전히 나오지 않은 것이다. 문과의 시험관을 도맡았던 서거정은 다시 한번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중 1474년(성종 5) 대구 사람 양희지(楊熙止)가 문과 식년시에 급제하면서 16년 만에 도하의 뒤를 이었다. 양희지는 ‘문무를 겸비한 호걸’로 이름을 떨치며 승문원 정자, 주부를 거쳐 홍문관 수찬에 오른 대구의 인재였다. 서거정은 그런 양희지를 ‘도하의 뒤를 이은 인재’로 꼽으며 ‘내 고향(대구)이 노나라와 같은 학문의 고장으로 바뀔 일대 기회’라며 칭송했다.

서거정은 또 명문장으로 대구에 대한 각별한 정을 표하기도 했다. 지금도 명문으로 남아있는 ‘대구십영(大丘十詠)’이 그것이다. 대구십영은 대구에서 경치가 아름다운 10곳을 소개한 칠언절구 시를 일컫는다. 서거정은 1488년(성종 19) 69세 나이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았다. 대구 북구 산격동 구암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2. 인재의 산실 연경서원과 한강 정구의 제자들

15세기 ][서거정]]이 대구의 문풍 진작과 인재 배출의 물꼬를 튼 후, 16세기 들어서 대구는 ‘학문의 고장’으로 거듭났다. 이는 대구가 ‘인재의 요람’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1565년(명종 20) 대구 최초의 서원인 연경서원(硏經書院)이 건립되면서 본격적인 ‘지방 교육의 시대’를 열었다. 연경서원은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의 아들 매암 이숙량(梅巖 李叔樑)과 대구 선비 계동 전경창(溪東 全慶昌)이 주도해 세워졌고, 이후 지역 인재 양성의 산파 역할을 했다.

연경서원 설립 후 이곳에서 학문을 닦고 연마한 대표적 유학자는 서원 건립을 주도했던 전경창을 비롯해 송담 채응린(松潭 蔡應麟), 임하 정사철(林下 鄭師哲) 등이었다. 이들은 대구가 배출한 대표적 인재들로, 이 지역 성리학의 선구자로 이름이 높았다. 대구 유학의 르네상스를 연 ‘1세대 인재’들이기도 했다.

특히 연경서원 건립을 주도한 전경창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대구 성리학의 스승’으로 불릴 만큼 명성이 높았다. 1532년(중종 27) 대구 수성 파잠(巴岑, 지금의 수성구 파동)에서 태어난 그는 24세 되던 1555년(명종 10) 진사시에 합격했다. 30세 이전에 퇴계 문하에서 공부했고, 한때 가야산에 들어가 학문에 힘을 쏟기도 했다. 34세 되던 1565년에 연경서원 건립에 힘을 보탰고, 서원 설립 이후인 35세 때부터는 대구의 유림들과 교유하며 본격적인 강학에 나서며 후학을 양성했다. 42세 되던 1573년(선조 6)에는 문과 식년시에서 병과(丙科) 3위를 차지해 벼슬길에 올랐다. 관직은 검열·정언에 이르렀다. 대구시 수성구 파동에 있는 옥산전씨 집안 재실인 무동재에 모셔져 있다.

채응린 역시 학문이 뛰어나 27세 되던 1555년(명종 10)에 생원시에 합격했지만 을사사화 이후 더 이상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정사철은 선조 때 선사재(대구시 달성군 다사읍)에 서당을 열고 지역의 유림을 모아 강학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공산에서 창의해 대구지역 의병인 공산의진군의 의병대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연경서원 건립과 비슷한 시기에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금호강 하류 사수(泗水, 지금의 대구 북구 사수동)에 터를 잡고 살며 강학을 하면서 대구의 문풍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대구에 정착한 한강은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과 연경서원 건립을 주도한 전경창 등과 교유하며 대구지역 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연경서원에서 강학하며 수많은 후학을 양성해 대구가 인재의 요람으로 거듭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한강의 대표적인 제자가 낙재 서사원(樂齋 徐思遠), 모당 손처눌(慕堂 孫處訥) 투암 채몽연(投巖 蔡夢硯), 괴헌 곽재겸(槐軒 廓再謙), 양직당 도성유(養直堂 都聖兪), 서재 도여유(鋤齋 都汝兪), 동고 서사선(東皐 徐思選), 사월당 류시번(沙月堂 柳時蕃) , 도곡 박종우(陶谷 朴宗祐), 낙애 정광천(洛涯 鄭光天) 등이었다. 이들은 ‘한강학파’로 불리며 대구의 대표적 인재로 성장했다. 이 중 서사원, 곽재겸, 손처눌 등은 한강의 초기 제자들로, 스승을 만나기 전에는 한강의 벗인 전경창 아래에서 학문을 닦고 연구한 이들이기도 하다.

한강의 제자 중 모당 손처눌은 대구가 인재의 요람으로 발돋움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1553년(명종 8) 대구부 수성리(지금의 대구시 수성구)에서 태어나 한평생 한강 정구를 스승으로 모신 그는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전란 중에 부모상을 당해 상례를 다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다 전쟁이 끝난 후인 1600년, 48세 되던 해에 황청동(지금의 수성구 황금동) 부모 묘소 아래 거처를 마련했다. 이때 마련한 거처를 ‘영모당(永慕堂)’이라 했다. 이곳에서 시묘살이를 하며 부모에게 못한 효를 실천했다. 동시에 영모당을 중심으로 강학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영모당에서는 무려 202명의 제자를 배출해 대구가 인재의 요람으로 자리잡는 데 크게 기여했다. 모당이라는 호도 영모당에서 비롯됐다.

지금의 황금동은 임진왜란 이후 손처눌이 정착하며 개척한 마을로 알려져 있다. 당시 ‘들녘(수성들)의 곡식이 황금물결을 이루고, 푸른 산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곳’이라고 해서 황청동(黃靑洞)으로 이름 붙였다고 한다. 하지만 저승을 뜻하는 황천(黃泉)으로 잘못 발음하는 경우가 많아 1977년 동명을 황금동으로 개칭했다. 손처눌은 1634년(인조 12) 세상을 떠났고, 1694년(숙종 20) 수성구 황금동에 있는 청호서원에 배향됐다.

바깥고리

* [: 서거정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학자]
* [: 서거정]
* [위키백과 : 서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