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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후(조선)|서후]](徐厚 대사간(大司諫) 정3품) |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후(조선)|서후]](徐厚 대사간(大司諫) 정3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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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고고고조할아버지:서포(徐包 증참판(贈參判) | *************** 큰고고고조할아버지:서포(徐包 증참판(贈參判) | ||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고(조선)|서고]](徐固 예조참의(禮曹參議) |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고(조선)|서고]](徐固 예조참의(禮曹參議) |
2022년 8월 14일 (일) 19:12 판
서호수(徐浩修) | |
대표명칭 | 서호수 |
---|---|
한자표기 | 徐浩修 |
생몰년 | 1736-1799 |
본관 | 대구(大邱) |
시호 | 문민(文敏), 정헌(靖憲) |
자 | 양직(養直) |
시대 | 조선 |
국적 | 조선 |
대표저서 | 해동농서, 동국문헌비고, 연행기 |
대표직함 | 예조판서 |
부 | 서명응(徐命膺) |
모 | 이정섭(李廷燮)의 딸 전주 이씨 |
자녀 | 서유구, 서유본 |
목차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이다.
내용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 서씨 시조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계
본관은 대구(大邱)이고 자는 양직(養直)이다. 우참찬 서문유(徐文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판서 서종옥(徐宗玉)이고, 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명응(徐命膺)이다.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이정섭(李廷燮)의 딸이다. 큰 아버지 서명익(徐命翼)에게 입양되었다.
가족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대부.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
- 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거광(徐居廣 언양현감)
- 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서팽소(徐彭召 사헌부장령)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후(徐厚 대사간(大司諫) 정3품)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구(徐久 승사랑공파(承仕郞公派))
- 큰고고고조할아버지:서포(徐包 증참판(贈參判)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고(徐固 예조참의(禮曹參議)
- 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서팽소(徐彭召 사헌부장령)
- 작은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거정 (徐居正 좌찬성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거광(徐居廣 언양현감)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
저술 및 편찬활동
1765년(조선 영조 41) 식년 문과에 장원하였다. 1770년에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과 함께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대사성·대사헌 등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당대 문화사업의 핵심 기관이었던 규장각의 직제학이 되었다. 이후 규장각의 여러 편찬사업에 주도적 역할을 다하였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의 기초가 된 『어제춘저록(御製春邸錄)』의 간행을 주관하기도 하였다.[1] 이 외에도 『해동농서』, 『국조역상고』 등의 책을 저술하였다.
두 차례의 사행
1776년(조선 정조 원년)에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서 이은(李溵)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남인(南人)으로 우의정의 자리에 있던 채제공(蔡濟恭)과 소론(少論)의 명문이었던 그의 집안과의 갈등으로 일시 휴직했다가 1790년에 다시 진하 겸 사은부사로 두 번째 청나라에 사행(使行)하였다. 이 때의 여행일기가 『연행기(燕行紀)』이다.[2]
지식 관계망
- 대구 서씨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서명응 | 서호수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서호수 | 서유구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북학파 | 서호수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동국문헌비고 | 서호수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동국문헌비고 | 홍봉한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홍재전서 | 어제춘저록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어제춘저록 | 서호수 | A는 B에 의해 간행되었다 | A dcterms:publisher B |
어제춘저록 | 조선 정조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홍재전서 | 조선 영조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해동농서 | 서호수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국조역상고 | 서호수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이은 | 서호수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체제공 | 서호수 | A는 B와 대립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연행기 | 서호수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1770년 | 서호수가 홍봉한과 함께 동국문헌비고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
1776년 | 서호수가 이은과 청나라에 다녀왔다 |
1790년 | 서호수가 청나라에서 연행기를 저술하였다 |
주석
참고문헌
1775년 윤10월 27일 여러 대신(大臣)과 예조 당상이 동지하례(冬至賀禮)를 청하였으나 영조가 윤허하지 않으니 왕세손이 곁에 있으면서 웃어른을 모시는 시측(侍測)하였다가 간절히 청하였다. 영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아뢰기를 “세손의 효성을 굽어 살펴보시고 여러 백성들의 심정을 특별히 따르시면 한 나라가 거의 효도로써 일어날 것입니다.”하고 승지 서호수(徐浩修)가 아뢰기를 “동지절(冬至節)과 성상(聖上)의 탄강(誕降)하신 해의 간지(干支)가 갑술(甲戌)인 것은 더욱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하니 영조가 이르기를 “이는 사실 이상한 일이다.”하였다. 왕세손이 또 간곡히 청하니 영조가 이르기를 “이와 같이 은근한 정성은 금석(金石)이라도 뚫겠다. 이 당(堂)에서 하례를 받아 어린 세손의 마음을 펴도록 하겠다.”하였다.
1783년 7월 4일 이조 판서 서호수(徐浩修)가 정조에게 상소하기를 "가뭄이나 홍수로 흉년이 드는 것은 나라로서는 면할 수 없는 바이기에 옛적의 성인들은 저수(貯水)와 하수(下水)의 설비를 하여 가뭄과 홍수에 대비하였고 조적(糶糴)하는 행정을 마련하여 흉년에 대비해 온 것이니 비록 요(堯) 임금과 탕(湯)임금이 홍수나 가뭄에 대비하였다 하더라도 이러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습니다.지금 경기(京畿)와 양호(兩湖)의 재해를 입은 각 고을 중에 수원(水源)이 있어서 관개(灌漑)한 논밭은 그다지 흉년이 들지 않았지만 오직 산골의 높고 건조한 곳과 넓은 들녘의 척박한 지역은 못자리가 말라서 여기저기가 전부 버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 나라의 농민들이 평소에 저수하고 하수하는 방법에 어둡기에 10여 고을이 몇 순(旬) 동안에 가뭄을 방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보다도 더 큰 한재(旱災)가 있게 된다면 장차 어떻게 계책을 세우겠습니까? 대저 농사 일이 허술하게 된 것은 농구(農具)가 갖추어 지지 않았기 때문이니 마땅히 이 번에 한 번 강구(講究)해서 설치하여 이 뒤에도 두고 쓰는 자료가 되게 해야 합니다.
신이 듣건대 효종(孝宗) 원년(元年)에 수거(水車) 한 구(具)를 비변사(備邊司)에 내하(內下)하며 하교하기를 ‘연경(燕京)이나 심양(瀋陽)에서는 관개(灌漑)에 사용하는 것이 수거 만한 것이 없었다. 우리 나라는 이 것의 제작에 전혀 어두워 비록 지척(咫尺)의 자리에 콸콸 흐르는 물이 있다 하더라도 지형(地形)이 조금 높기만 하면 어찌할 수 없게 된다. 이 번에 공장(工匠)들로 하여금 그런 제작대로 만들어 내었다가 외방(外方)에 전포(傳布)하여 권농(勸農)에 도움이 되게 하라.’고 하셨었습니다. 비변사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제작이 매우 정교(精巧)하고 회전(回轉)이 신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로 가호(家戶)마다 설비한다면 가뭄 대비에 도움됨이 반드시 적지 않겠습니다.’하고 따라서 10구(具)를 만들어 8도(八道)와 양도(兩都)에 나누어 보냈었습니다. 그러나 관장(官長)인 사람들은 번거로움을 견디면서 이해하려는 성의가 없었고, 공장인 사람들은 생각을 짜내어 운전이 정교해지게 할 재주가 없어서 드디어 대성인(大聖人)께서 잘 이용(利用)하여 사람들이 혜택을 입게 하려 하신 굉장한 제작을 폐기해 버리고 시행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영종(英宗) 16년에 와서는 고(故) 상신(相臣) 유척기(兪拓基)가 비국(備局)에 남아 있는 그 제작을 보고서 이어 시행하기 계청(啓請)하자 영종께서 특별히 다시 만들어서 반포(頒布)하도록 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개 수거(水車)의 제작은 또한 허다하게 갖가지 것이 있기도 합니다만 황명(皇明)의 각신(閣臣) 서광계(徐光啓)의 저술인 농정전서(農政全書)의 내용에 용미거(龍尾車)의 공용(功用)에 관하여 마침 말하기를 ‘여러 개를 접속(接屬)해서 올려 가면 산에서도 사용하게 될 수 있으니, 이는 가무는 해와 높이 있는 전답이 근심할 것 없게 되는 것이고, 밭두둑 쌓아가기는 날짜를 계산해 가며 다하게 되는 것이니 이는 임우(霖雨)지는 해와 낮게 있는 전답을 근심할 것 없게 되는 일이다. 옛적이나 지금이나 저수(貯水)하고 하수(下水)하는 기구가 이 용미거처럼 제작이 정묘하고 이익이 많은 것이 있지 않았으니 비록 재성 보상(財成輔相)이라고 말하더라도 또한 지나친 말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臣)이 양조(兩朝)에 반포했던 수거도 또한 용미거의 제작과 같은 것이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요컨대 공효와 이익이 넓었음이 일치(一致)했을 것입니다. 만일 이 번에 사고(思考)가 정교한 공장(工匠)을 얻어 한결같이 농서(農書)의 기록에 의해서 10여 구를 만들어 내도록 하고, 아울러 사용하는 방법도 곁들이어 8도(八道)와 양도(兩都)에 반포하게 하고, 또한 각 도의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에서 만들어 각 고을에 반포하도록 한다면 강과 냇가의 광막한 들판이 설사 오랜 가뭄을 만나게 된다 하더라도 즉시 관개(灌漑)해 가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의 계책과 민생들의 생활이 반드시 이에서 힘입게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양조(兩朝)에 이미 시작했다가 성취하지 못했던 훌륭한 일을 그야말로 오늘날에 이르러 성취하게 된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옛적부터 흉년의 행정에 관하여 논해 놓은 것이 여러 가지 있었지만 상평법(常平法)을 근본 삼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비록 송(宋) 날마다 행한 일을 밤이면 반드시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향불을 피워 놓고서 하늘에 고하였던 조변(趙抃)과 하북 선무사(河北 宣撫使)로 나가 하삭(河朔) 지방에 홍수가 지자 많은 이재민을 구제하였던 부필(富弼)처럼 진휼(賑恤)을 잘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시행하고 조치한 것을 보건대 상평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고 주자(朱子)의 사창(社倉)은 진실로 주관(周官)의 쌀을 비축해 두었다가 흉년에 보태어 먹는 위적(委積)하는 제도였는데 이는 또한 상평법을 가지고 추연(推演)한 것이었습니다.
대저 동도(東道)에 흉년이 들었을 적에 서도에서 곡식을 옮겨 온다면 서로의 민생들이 또한 굶주리게 될 것이고, 북도에 흉년이 들었을 적에 남도에서 곡식을 옮겨 온다면 남도의 민생들이 또한 굶주리게 될 것이니 차라리 동서 남북에다 각각 위적(委積)하여 본도의 흉년에 대비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 것이 진실로 상평법의 의의가 담긴 일입니다. 영종조(英宗朝)에 북관(北關)에 흉년이 들자 영남(嶺南) 포항(浦項)의 곡식을 조운(漕運)하도록 했었는데, 바닷길이 멀고 험난하여 이따금 취재(臭載)하는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영종께서 하교하시기를 ‘이 뒤로 북관 백성의 굶주리는 자는 북쪽에서 취식(就食)하게 하고 남쪽 백성의 굶주리는 자는 남쪽에 취식하게 하고 싶다.’고 하시고 드디어 양호(兩湖)에는 제민창(濟民倉)을 설치하게 했었으니 위대하신 성인(聖人)의 계책이었습니다.신이 삼가 그윽이 생각해 보건대 왕기(王畿)는 곧 외방(外方) 8도(八道)의 근본이 되는 자리인데, 요사이에는 해마다 가뭄이 들어 접제(接濟)해 가는 곡물을 오로지 다른 도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작 년에는 이미 관서(關西)의 곡식을 옮겨 왔었고 올 해에는 또한 호서(湖西)의 곡식을 옮겨 오게 되었는데 성상께서 내리신 하교에 ‘호서 백성들의 노고도 또한 돌보아 주지 않아서는 안된다.’고 하여 먼 데나 가까운 데나 누구나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하는 1시 동인(一視 同仁)하시는 훌륭하신 덕이 전성(前聖)과 후성(後聖)에 있어서 한결같은 법도였음을 우러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내(畿內)의 곡부(穀簿)에 있어서는 겨우 진제(賑濟)를 넘기게 되었지만 각 고을의 창고에 남아 있던 것은 거의 모두 바닥이 나버렸는데, 또한 따로 종전처럼 불우(不虞)에 대비해 놓은 위적(委積)이 없으니 곡식을 옮겨오는 이외에는 대저 어떻게 따로 길거(拮据)해 갈 방도가 있겠습니까?
지금 비가 내리어 다행히도 적시어 주게 된 만큼 이대로 계속해서 흡족하게 내리어 추수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호서의 곡식 3천 석(石)을 만일 곡종(穀種)으로 써버리게 되지 않는다면 그 나머지의 곡식을 가져다가 기본(基本)으로 삼게 하고, 특별히 호조(戶曹)인 탁지(度支)의 신하와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어느 아문(衙門)의 곡식을 구획(區劃)하여 1만 석의 수량을 채우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결같이 남쪽의 제민창과 북쪽 교제창(交濟倉)의 예에 의하여 경기(京畿) 안의 각 고을 중에 선로(船路)가 편리한 가까운 곳에다 창고를 만들고서 춘추(春秋)로 조적(糶糴)을 하되 3분의 2를 유치하고 1을 분급하는 2유 1분(二留一分) 규정을 본받아 하도록 한다면 곡물이 항시 여유가 있어 민생들의 먹을 것이 의뢰할 데가 있게 될 것이고, 앞으로 진제(賑濟)해야 할 때를 만나게 된다 하더라도 각 도에서 전수(轉輸)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벗어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정조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명하였다. 비변사에서 계청하기를 "수거(水車)는 그 방법대로 만들어서 반포하고, 곡식을 저축하는 일은 연사(年事)가 풍년 들기를 기다렸다가 구획해 가기 바랍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어 서호수(徐浩修)에게 명하여 용미거(龍尾車) 만드는 일을 감독하도록 하였는데 용미거가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반포하는 일은 실현하지 못했다.
1791년 6월 22일 예조 판서 서호수(徐浩修), 사직(司直) 이민보(李敏輔) 등이 정조에게 상소하기를 "신들이 지난 번 태묘의 재전(齋殿)에서 접현하였을 때 장악원 제거(掌樂院 提擧)로 임명받았고 이어 제사 때 쓰는 악장이 아직도 한 편의 완전한 책으로 된 것이 없다 하여 신들에게 편찬해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신들은 먼저 악장을 서술하고 이어서 가보(歌譜)를 덧붙여 아악(雅樂)과 영악(令樂) 두 부분으로 편찬하였습니다."하였다.
1792년 윤4월 24일 예조 판서 서호수(徐浩修)가 아뢰기를 "석왕사(釋王寺) 토굴(土窟)의 옛 터에 무학 대사(無學大師)의 조그마한 초상(肖像)이 있는데 승려들이 모두 말하기를 ‘휴정(休靜)과 유정(惟政)은 임진 왜란 때의 전공(戰功)으로 모두 사당을 세우고 사액(賜額)을 하였는데, 무학 대사는 곧 개국 1등 공신인데도 전적으로 봉향(奉享)하는 곳이 없으니 돌아가면 임금께 아뢰어 조그마한 초상을 모사하여 토굴에 모시고 춘추(春秋)로 제사를 지내도록 해주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소원대로 허락하소서."하니 따랐다.
더 읽을 거리
- 논문
- 박권수, 「조선후기 달성서씨가의 학풍과 실학 : 서명응,서호수 부자의 과학활동과 사상 -천문역산(天文曆算) 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Vol.11, 한국실학회, 2006.
유용한 정보
- 정성희, "조선후기 천문학을 이끈, 서호수", 『경기일보』, 작성일: 2017년 09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