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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아버지 : [[서정리(서정리)|서정리]](徐貞履 부사) | ******************* 친아버지 : [[서정리(서정리)|서정리]](徐貞履 부사) |
2022년 8월 12일 (금) 08:11 판
목차
정의
조선후기 공조참판, 강릉부사,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족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공.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
개설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도윤(道潤), 호는 몽어정(夢漁亭). 판서 서성(徐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제조(提調) 서경주(徐景霌)이고, 아버지는 남원부사 서정리(徐貞履)이다. 어머니는 판서 이사발(李時發)의 딸이다. 당숙인 함경도관찰사 서원리(徐元履)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57년(효종 8)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1673년(현종 14)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동몽교관에 임명되었다. 그 뒤 계속 승진해 청도군수·이천부사·상주목사를 역임하고, 1680년(숙종 6)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당상관에 올랐다.
다음 해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되어 남한산성 수축에힘쓰고 1682년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너무 빨리 승진한다는 말이 있어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호조참판을 거쳐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재판을 공정히 하는데 크게 노력하였다. 백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군액을 삭감하자고 건의하였다.
그 뒤 예조참판·도승지·좌윤·공조참판을 거쳐 1686년 공조판서가 되어 군량미 비축에 힘쓰고, 다음 해 형조판서 겸 종묘·빙고(氷庫)의 제조(提調)가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세력이 득세할 때 우참찬으로 재직하다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났다.
이듬해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경주부윤과 강릉부사를 역임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득세하자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등용되었으나, 희빈 장씨(禧嬪張氏) 및 남인에 대한 징계 문제에 온건론을 주장하다 조정에서 배척받아 금천(衿川)에 퇴거하였다.
그 뒤 박세채(朴世采)의 건의로 서용되어 훈련대장·형조판서·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695년에서 이듬해까지 기근구제 사업에 공을 세우고 1696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같은 해 청나라에 파견되어 세자 책봉을 요청하였다. 서문중이 평소 희빈장씨와 세자에 대해 우호적이었다는 점을 반영하여 책봉사로 선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청나라에서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종번왕(宗藩王)의 예(例)를 인용하면서 책봉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1697년 양사에서 서문중을 귀양보내기를 청하고, 서문중도 도성 밖에서 청죄(請罪)하였다. 하지만 숙종은 돈녕부판사에 임명하였다. 1699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고 1701년 판중추부사로 호위대장을 겸했다가 이듬해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정치적으로 소론(少論) 입장이었고, 군사제도와 그 운영에 밝았으며 기근구제 사업에 많은 구실을 하였다. 넓은 도량과 굳은 지조가 있었으며 평생을 조심하며 한결같이 근신했다고 한다. 독서를 좋아하여 하루도 책을 보지 않는 날이 없었다. 특히, 사적(史籍)에 관심이 많아 역대 사실을 꿰뚫지 않는 것이 없었다.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지리적·군사적 사정을 정리해 『해방지(海防誌)』를 엮었다. 의정부에 재직할 때는 각 지방의 성지(城池)·토전(土田)·호구(戶口)·곡물·전함·봉수·진보(鎭堡)·우역(郵驛)·군대 등을 조사해 『군국총부(軍國摠簿)』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 밖에도 조선시대의 여러 고사를 엮은 『조야기문(朝野記聞)』·『상제례가범(喪祭禮家範)』·『역대재상연표(歷代宰相年表)』·『국조대신연표(國朝大臣年表)』·『병가승산(兵家勝算)』·『동인시화(東人詩話)』 등의 많은 저서를 남겼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