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신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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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 =='''정의'''== | ||
− | 한국 최초의 | + | 1896년 창간된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지이다. |
=='''내용'''== | =='''내용'''== | ||
===정부 자금으로 창간=== | ===정부 자금으로 창간=== | ||
− |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서재필(徐載弼)]]이 정부로부터 신문사 창설비 3, | + |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서재필(1864~1951, 徐載弼)]]이 정부로부터 신문사 창설비 3,000원에 [[서재필]]의 주택구입비 1,400원을 보태 1896년(조선 고종 33) 4월 7일 창간하였다. 처음에는 가로 22cm, 세로 33cm의 국배판 정도 크기로 4면 가운데 3면은 한글전용 『독립신문』으로, 마지막 1면은 영문판 『The Independent』로 편집하였다.<ref>"[http://www.doopedia.co.kr/search/encyber/new_totalSearch.jsp 독립신문]",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br/> |
− | 창간 이듬해인 1897년 1월 5일자부터 국문판과 영문판을 분리하여 두 가지 신문을 발행하였다. | + | 창간 이듬해인 1897년 1월 5일자부터 국문판과 영문판을 분리하여 두 가지 신문을 발행하였다. 순한글 세로쓰기 본문으로 논설과 국내외 소식 보도 및 광고를 실어 명실상부한 신문의 면모를 갖추었다.<ref>"[http://www.doopedia.co.kr/search/encyber/new_totalSearch.jsp 독립신문]",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
===논평과 비판=== | ===논평과 비판=== | ||
− | 독립신문은 논평과 비판을 신문의 중요한 기능으로 삼았다. 1면 머리에 논설을 실어서 정부와 집권 위정자들의 비정(秕政)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를 폭로했으며, 민간인의 잘못도 서슴지 않고 지적했다. [[서재필]]은 창간호 논설에서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요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적을 | + | 독립신문은 논평과 비판을 신문의 중요한 기능으로 삼았다. 1면 머리에 논설을 실어서 정부와 집권 위정자들의 비정(秕政)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를 폭로했으며, 민간인의 잘못도 서슴지 않고 지적했다. [[서재필]]은 창간호 논설에서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요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적을 펴이겠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그는 부패 무능한 정부 관리들을 비판하는 한편 이권 침탈에 혈안이 된 열강 세력의 부당한 요구에 저항했다.<ref>장진석, 『한국 신문 역사』, 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2013.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25268&cid=42192&categoryId=42215 독립신문과 서재필]", 한국 근현대사 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br/> |
− | 1883년 10월부터 1888년 7월까지 정부 기구인 [[박문국]]에서 발행한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는 정부가 직접 발행한 신문이므로 논평과 비판 기능이 없었다. 그러나 민간이 발행한 『독립신문』은 | + | 1883년 10월부터 1888년 7월까지 정부 기구인 [[박문국]]에서 발행한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는 정부가 직접 발행한 신문이므로 논평과 비판 기능이 없었다. 그러나 민간이 발행한 『독립신문』은 비판 기능과 외세의 침략에 대한 저항정신을 지키고 있었으며 이는 한국 언론의 정신적 출발점이 되었다.<ref>장진석, 『한국 신문 역사』, 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2013.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25268&cid=42192&categoryId=42215 독립신문과 서재필]", 한국 근현대사 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서재필]]의 추방=== | ===[[서재필]]의 추방=== | ||
− | 『독립신문』이 정부 고위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열강의 이권침탈을 규탄하여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고 국민의 여론을 선도하자 불만을 품은 러시아 공사관과 수구파들은 [[서재필]]의 추방을 획책하게 되었다. 일본도 이에 | + | 『독립신문』이 정부 고위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열강의 이권침탈을 규탄하여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고 국민의 여론을 선도하자 불만을 품은 러시아 공사관과 수구파들은 [[서재필]]의 추방을 획책하게 되었다. 일본도 이에 동조했음은 물론 조선 정부도 [[서재필]]의 태도에 대해 정부도 불만을 품고 있었다.<ref>장진석, 『한국 신문 역사』, 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2013.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25268&cid=42192&categoryId=42215 독립신문과 서재필]", 한국 근현대사 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br/> |
− | 이리하여 1897년 12월 13일 외부대신 [[조병식]]은 주한 미국공사 [[호러스 알렌|호러스 알렌(Horace N. Allen)]]에게 [[서재필]]의 중추원 고문직 해임을 | + | 이리하여 1897년 12월 13일 외부대신 [[조병식]]은 주한 미국공사 [[호러스 알렌|호러스 알렌(Horace N. Allen)]]에게 [[서재필]]의 중추원 고문직 해임을 통보하였다. 이튿날인 12월 14일에는 농상공부에 조회하여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임했으므로 독립신문도 폐간시키라고 요청했다.<ref>장진석, 『한국 신문 역사』, 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2013.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25268&cid=42192&categoryId=42215 독립신문과 서재필]", 한국 근현대사 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정부 매수와 폐간=== | ===정부 매수와 폐간=== | ||
− | 1898년 5월 14일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윤치호|윤치호(尹致昊)]]가 주필 겸 | + | 1898년 5월 14일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윤치호|윤치호(尹致昊)]]가 주필 겸 실질적 관리자로 운영을 맡았다. [[윤치호]]는 창간 이후 격일간으로 주 3회 발행하던 것을 1898년 7월 1일부터 일간으로 발전시켰다. 1899년 1월 [[윤치호]]가 덕원부사겸원산감리(德源府使兼元山監理)가 되어 신문발행에서 손을 떼자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가 한동안 주필이 되었고, 6월 1일부터는 영국인 [[엠벌리|엠벌리(Emberley)]]가 맡았으나, 정부가 이 신문을 매수하여 1899년 12월 4일자로 폐간하였다.<ref>"[http://www.doopedia.co.kr/search/encyber/new_totalSearch.jsp 독립신문]",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
− | + | 『독립신문』은 창간부터 폐간에 이르는 43개월 동안 한글판 776호, 영문판이 442호까지 발행하였다. | |
===평가와 의의=== | ===평가와 의의=== | ||
− | 독립신문은 구독료와 광고료를 주축으로 운영되었고, 취재기자를 두었으며, 지국을 설치하고 가두판매를 하였다. 이러한 제작 방법과 경영은 독립신문이 관보의 성격을 벗어나 정부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는 | + | 독립신문은 구독료와 광고료를 주축으로 운영되었고, 취재기자를 두었으며, 지국을 설치하고 가두판매를 하였다. 이러한 제작 방법과 경영은 독립신문이 관보의 성격을 벗어나 정부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독립신문은 정치, 사회문제와 정부의 시책을 비판하고, 이와 관련한 다양한 견해와 대안을 제시하였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407&index_id=cp04070002&content_id=cp040700020001&search_left_menu=1 독립신문]", 독립신문과 만민공동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콘텐츠닷컴』<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ref> 이로써 19세기 말 한국사회의 발전과 민중의 계몽을 위하여 지대한 역할을 수행한 한 시대의 기념비적인 신문으로 평가받고 있다.<br/> |
− | 뿐만 아니라, 독립신문의 독자들이 이 신문을 매개로 정치, 사회의식을 공유하고 당시의 제 문제들을 논의했다는 점에서 근대토론문화의 탄생을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독립신문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신문의 의미와 역할, 그리고 공동의 토론장에 대한 성찰을 | + | 뿐만 아니라, 독립신문의 독자들이 이 신문을 매개로 정치, 사회의식을 공유하고 당시의 제 문제들을 논의했다는 점에서 근대토론문화의 탄생을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독립신문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신문의 의미와 역할, 그리고 공동의 토론장에 대한 성찰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독립신문 창립일인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제정하였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407&index_id=cp04070002&content_id=cp040700020001&search_left_menu=1 독립신문]", 독립신문과 만민공동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콘텐츠닷컴』<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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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고려)|서정]](徐靖),우복야 [[서균(고려)|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고려)|서린]](徐嶙), 평장사 [[서공(고려)|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고려)|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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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고려)|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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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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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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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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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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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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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 ||
+ | [[https://open.kakao.com/o/gBQB1q6c]]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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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대구(大丘). 호는 송재(松齋). 미국 귀화명은 제이슨(Jaishon, P.). 전라남도 보성 출신. [[서광효]](徐光孝)의 둘째 아들이다. 어렸을 때 충청도 진잠현(鎭岑縣)의 7촌 아저씨 [[서광하]](徐光夏)에게 입양되었다. | ||
+ | |||
+ | == 가족 == | ||
+ |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 ||
+ | |||
+ |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 ||
+ | |||
+ |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
+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성(조선)|서성]](徐渻 판중추부사 종1품)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우(조선)|서경우]](徐景雨 우의정 정1품) | ||
+ |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원리]](徐元履 함경도 감사) | ||
+ |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문중(조선)|서문중]](徐文重 영의정 정1품)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수(조선)|서경수]](徐景需 전첨.증 이조판서 정2품) | ||
+ |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형리]](徐亨履) | ||
+ | **** 고고고고고고고할아버지: [[서문도]](徐文道 사평(司評)) | ||
+ |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종제]](徐宗悌 영조의 국구.달성부원군) | ||
+ | ****** 고모고고고할머니: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 ||
+ |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명백(조선)|서명백]](徐命伯 증 이조판서) | ||
+ |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덕수(조선)|서덕수]](徐德修 증 이조참판) | ||
+ | ******** 고고조할아버지: [[서유호]](徐有浩 군수) | ||
+ | ********* 고조할아버지: [[서일보]](徐日輔 도정) | ||
+ | ********** 증조할아버지: [[서진순(조선)|서진순]](徐震淳 진사) | ||
+ | *********** 할아버지: [[서상기]](徐相夔 생원) | ||
+ | ************ 친아버지(양아버지[[서광하]](徐光夏)): [[서광효]](徐光孝) | ||
+ | ************* 본인:[[서재필]](徐載弼 독립운동가) | ||
+ | |||
+ | == 가족 계보 == | ||
+ |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공. 종1품) | ||
+ | *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
+ |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
+ | ***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
+ | ****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
+ | ***** [[서신(고려1)|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
+ | ******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
+ | ******* [[서진(고려)|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
+ | ******** [[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
+ | ********* [[서영(고려)|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
+ | **********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
+ | *********** [[서의(고려3)|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
+ | ************ [[서미성(조선)|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 | ||
+ | ************* [[서거광]](徐居廣 언양현감) | ||
+ | ************** [[서팽소]](徐彭召 사헌부장령) | ||
+ | *************** [[서고(조선)|서고]](徐固 예조참의(禮曹參議) | ||
+ | **************** [[서해(조선)|서해]](徐嶰 학자) | ||
+ | ***************** [[서성(조선)|서성]](徐渻 판중추부사 종1품) | ||
+ | ****************** [[서경수(조선)|서경수]](徐景需 전첨.증 이조판서 정2품) | ||
+ | ******************* [[서형리]](徐亨履) | ||
+ | ******************** [[서문도]](徐文道 사평(司評)) | ||
+ | ********************* [[서종제]](徐宗悌 영조의 국구.달성부원군) | ||
+ | ********************** [[서명백(조선)|서명백]](徐命伯 증 이조판서) | ||
+ | *********************** [[서덕수(조선)|서덕수]](徐德修 증 이조참판) | ||
+ | ************************ [[서유호]](徐有浩 군수) | ||
+ | ************************* [[서일보]](徐日輔 도정) | ||
+ | ************************** [[서진순(조선)|서진순]](徐震淳 진사) | ||
+ | *************************** [[서상기]](徐相夔 생원) | ||
+ | **************************** [[서광하]](徐光夏) | ||
+ | ***************************** [[서재필]](徐載弼 독립운동가) | ||
+ | |||
+ | == [[서울독립문]](─獨立門) == | ||
+ |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941 | ||
+ | |||
+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대한제국기 자주독립을 위해 세운 문(門). 석조문. 사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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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독립신문]] == | ||
+ | 1896년 창간된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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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독립협회]] == | ||
+ | 1896년(조선 고종 33) 서울에서 조직된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이다. | ||
+ | |||
+ | == [[송재문화제]](松齋文化祭) == | ||
+ | 보성군은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창립 등 활동으로 조국의 자주독립에 평생을 바친 송재 [[서재필]] 선생을 기리는 ‘송재 문화제'를 개최했다. | ||
+ | |||
+ | == [[서재필기념공원]](徐載弼記念公園) == | ||
+ | 주암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강건한 삶을 살았던 독립투사 송재 [[서재필]] 선생의 유혼이 머무는 공간이다. 18세 나이로 갑신정변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던 [[서재필]]은 그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신문을 제작하고 독립문을 만들었으며,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쳤던 이다. 그가 태어난 문덕면 생가 앞에는 기념공원을 건립하여 추모하고 그의 정신이 살아있는 독립문을 재현하고 유품 8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이 지역은 보성군의 북부 지역으로 천년고찰의 대원사와 향토작가 전시관인 백민 미술관 그리고 주암호반, 승주 고인돌공원과 연계되어 교육문화관광코스로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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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재필의학상]] == | ||
+ | 의사이며 언론인으로서 일생동안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몸 바치신 민족의 선각자 [[서재필]](徐載弼) 선생의 업적과 사상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된 재단법인 [[서재필기념회]]에서는 애국애족의 정신을 바탕으로 의학의 교육, 진료, 연구 또는 봉사를 통하여 국내외에 큰 업적을 남기고 이 나라 의학계에 [[서재필]](徐載弼) 정신을 빛내준 의료인에게 매년 [[서재필의학상]]을 시상하고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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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재필언론문화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지인 [[독립신문]]을 창간한 언론인 [[서재필]](徐載弼) 선생을 기리기 위해 2011년 4월 재단법인 [[서재필기념회]]와 한국언론진흥재단에 의해 제정,수여되는 상입니다. 한국신문협회·한국방송협회·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가 후원하며 신문의 날(4월7일)을 전후하여 정해진 신문주간에 맞추어 시상되고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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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재필기념회]](서재필기념재단) == | ||
+ | 위치는 서울 종로구 대학로8가길 56 동숭빌딩 301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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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재필기념회]]는 민족선양사업의 일환으로 송재 [[서재필]] 관련 각종 문화사업을 통해 그의 사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설립된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재단법인이다. [[서재필의학상]] 수여, [[서재필언론문화상]] 수여, 올해의 민족언론인 선정, 헌창사업, 독립신문 연구지원, [[서재필]]에 관한 학술연구 지원 및 출판, [[서재필]] 관련 자료수집 및 연구지원, 기타 [[서재필]]의 사상과 겨레사랑을 기리는 민족선양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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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수의 여행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서재필]]이 쓴 소설로, 1922년 출간되었다. 그러나 영화화에 실패하고 묻혀졌다가 1978년부터 종증손 변호사 서동성, 종손자 법학자 서희원 등의 주도로 재출간되었다. 책의 한글 번역은 종증손 서동성이 맡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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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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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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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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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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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 ||
+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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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천 서씨]] | ||
+ | * [[대구 서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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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부여 서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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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남양 서씨]] | ||
+ | * [[당성 서씨]] | ||
+ | * [[봉성 서씨]] | ||
+ | * [[절강 서씨]] | ||
+ | * [[중국 서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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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일 (금) 16:18 기준 최신판
독립신문(獨立新聞) | |
대표명칭 | 독립신문 |
---|---|
한자표기 | 獨立新聞 |
영문명칭 | the Independence News |
유형 | 문헌 |
간행시기 | 1896년 4월 7일-1899년 12월 4일 |
시대 | 대한제국 |
크기 | 1건 1식 |
소장처 | 연세대학교 |
지정번호 | 등록문화재 제506호 |
지정일 | 2012년 10월 17일 |
목차
정의
1896년 창간된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지이다.
내용
정부 자금으로 창간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1864~1951, 徐載弼)이 정부로부터 신문사 창설비 3,000원에 서재필의 주택구입비 1,400원을 보태 1896년(조선 고종 33) 4월 7일 창간하였다. 처음에는 가로 22cm, 세로 33cm의 국배판 정도 크기로 4면 가운데 3면은 한글전용 『독립신문』으로, 마지막 1면은 영문판 『The Independent』로 편집하였다.[1]
창간 이듬해인 1897년 1월 5일자부터 국문판과 영문판을 분리하여 두 가지 신문을 발행하였다. 순한글 세로쓰기 본문으로 논설과 국내외 소식 보도 및 광고를 실어 명실상부한 신문의 면모를 갖추었다.[2]
논평과 비판
독립신문은 논평과 비판을 신문의 중요한 기능으로 삼았다. 1면 머리에 논설을 실어서 정부와 집권 위정자들의 비정(秕政)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를 폭로했으며, 민간인의 잘못도 서슴지 않고 지적했다. 서재필은 창간호 논설에서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요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적을 펴이겠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그는 부패 무능한 정부 관리들을 비판하는 한편 이권 침탈에 혈안이 된 열강 세력의 부당한 요구에 저항했다.[3]
1883년 10월부터 1888년 7월까지 정부 기구인 박문국에서 발행한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는 정부가 직접 발행한 신문이므로 논평과 비판 기능이 없었다. 그러나 민간이 발행한 『독립신문』은 비판 기능과 외세의 침략에 대한 저항정신을 지키고 있었으며 이는 한국 언론의 정신적 출발점이 되었다.[4]
서재필의 추방
『독립신문』이 정부 고위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열강의 이권침탈을 규탄하여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고 국민의 여론을 선도하자 불만을 품은 러시아 공사관과 수구파들은 서재필의 추방을 획책하게 되었다. 일본도 이에 동조했음은 물론 조선 정부도 서재필의 태도에 대해 정부도 불만을 품고 있었다.[5]
이리하여 1897년 12월 13일 외부대신 조병식은 주한 미국공사 호러스 알렌(Horace N. Allen)에게 서재필의 중추원 고문직 해임을 통보하였다. 이튿날인 12월 14일에는 농상공부에 조회하여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임했으므로 독립신문도 폐간시키라고 요청했다.[6]
정부 매수와 폐간
1898년 5월 14일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윤치호(尹致昊)가 주필 겸 실질적 관리자로 운영을 맡았다. 윤치호는 창간 이후 격일간으로 주 3회 발행하던 것을 1898년 7월 1일부터 일간으로 발전시켰다. 1899년 1월 윤치호가 덕원부사겸원산감리(德源府使兼元山監理)가 되어 신문발행에서 손을 떼자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가 한동안 주필이 되었고, 6월 1일부터는 영국인 엠벌리(Emberley)가 맡았으나, 정부가 이 신문을 매수하여 1899년 12월 4일자로 폐간하였다.[7] 『독립신문』은 창간부터 폐간에 이르는 43개월 동안 한글판 776호, 영문판이 442호까지 발행하였다.
평가와 의의
독립신문은 구독료와 광고료를 주축으로 운영되었고, 취재기자를 두었으며, 지국을 설치하고 가두판매를 하였다. 이러한 제작 방법과 경영은 독립신문이 관보의 성격을 벗어나 정부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독립신문은 정치, 사회문제와 정부의 시책을 비판하고, 이와 관련한 다양한 견해와 대안을 제시하였다.[8] 이로써 19세기 말 한국사회의 발전과 민중의 계몽을 위하여 지대한 역할을 수행한 한 시대의 기념비적인 신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독립신문의 독자들이 이 신문을 매개로 정치, 사회의식을 공유하고 당시의 제 문제들을 논의했다는 점에서 근대토론문화의 탄생을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독립신문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신문의 의미와 역할, 그리고 공동의 토론장에 대한 성찰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독립신문 창립일인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제정하였다.[9]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본관은 대구(大丘). 호는 송재(松齋). 미국 귀화명은 제이슨(Jaishon, P.). 전라남도 보성 출신. 서광효(徐光孝)의 둘째 아들이다. 어렸을 때 충청도 진잠현(鎭岑縣)의 7촌 아저씨 서광하(徐光夏)에게 입양되었다.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가족 계보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공. 종1품)
-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서울독립문(─獨立門)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941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대한제국기 자주독립을 위해 세운 문(門). 석조문. 사적.
독립신문
1896년 창간된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지이다.
독립협회
1896년(조선 고종 33) 서울에서 조직된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이다.
송재문화제(松齋文化祭)
보성군은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창립 등 활동으로 조국의 자주독립에 평생을 바친 송재 서재필 선생을 기리는 ‘송재 문화제'를 개최했다.
서재필기념공원(徐載弼記念公園)
주암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강건한 삶을 살았던 독립투사 송재 서재필 선생의 유혼이 머무는 공간이다. 18세 나이로 갑신정변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던 서재필은 그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신문을 제작하고 독립문을 만들었으며,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쳤던 이다. 그가 태어난 문덕면 생가 앞에는 기념공원을 건립하여 추모하고 그의 정신이 살아있는 독립문을 재현하고 유품 8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이 지역은 보성군의 북부 지역으로 천년고찰의 대원사와 향토작가 전시관인 백민 미술관 그리고 주암호반, 승주 고인돌공원과 연계되어 교육문화관광코스로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서재필의학상
의사이며 언론인으로서 일생동안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몸 바치신 민족의 선각자 서재필(徐載弼) 선생의 업적과 사상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된 재단법인 서재필기념회에서는 애국애족의 정신을 바탕으로 의학의 교육, 진료, 연구 또는 봉사를 통하여 국내외에 큰 업적을 남기고 이 나라 의학계에 서재필(徐載弼) 정신을 빛내준 의료인에게 매년 서재필의학상을 시상하고 있습니다.
서재필언론문화상
서재필언론문화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지인 독립신문을 창간한 언론인 서재필(徐載弼) 선생을 기리기 위해 2011년 4월 재단법인 서재필기념회와 한국언론진흥재단에 의해 제정,수여되는 상입니다. 한국신문협회·한국방송협회·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가 후원하며 신문의 날(4월7일)을 전후하여 정해진 신문주간에 맞추어 시상되고 있습니다.
서재필기념회(서재필기념재단)
위치는 서울 종로구 대학로8가길 56 동숭빌딩 301호
서재필기념회는 민족선양사업의 일환으로 송재 서재필 관련 각종 문화사업을 통해 그의 사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설립된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재단법인이다. 서재필의학상 수여, 서재필언론문화상 수여, 올해의 민족언론인 선정, 헌창사업, 독립신문 연구지원, 서재필에 관한 학술연구 지원 및 출판, 서재필 관련 자료수집 및 연구지원, 기타 서재필의 사상과 겨레사랑을 기리는 민족선양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한수의 여행
한수의 여행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서재필이 쓴 소설로, 1922년 출간되었다. 그러나 영화화에 실패하고 묻혀졌다가 1978년부터 종증손 변호사 서동성, 종손자 법학자 서희원 등의 주도로 재출간되었다. 책의 한글 번역은 종증손 서동성이 맡았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같이 보기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독립신문 | 독립협회 | A는 B에 의해 간행되었다 | A dcterms:publisher B |
독립협회 | 서재필 |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 A ekc:founder B |
독립신문 | 서재필 | A는 B에 의해 간행되었다 | A dcterms:publisher B |
독립신문 | 윤치호 | A는 B에 의해 간행되었다 | A dcterms:publisher B |
독립신문 |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 A는 B에 의해 간행되었다 | A dcterms:publisher B |
독립신문 | 신문의 날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 SBS 뉴스 - 역사적 가치' 한성순보·독립신문 문화재 된다(방송일 : 2012년 8월 20일)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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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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