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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가택을 지키는 [[서기원(포천)|서기원]] 옹(93세)의 아들 [[서동량]] 박사는 “그녀( | + | 종가택을 지키는 [[서기원(포천)|서기원]] 옹(93세)의 아들 [[서동량]] 박사는 “그녀([[고성 이씨 부인]])는 남편이 죽고나서 아들 [[서성(조선)|서성]]을 공부시키기 위해 안동에서 청주로 이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청주에서 아들 [[서성(조선)|서성]]을 키우기에는 부족한 곳이라 생각되어 서울로 옮겼다”고 했다. |
− | 또, “외동딸로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물려받은 그녀( | + | 또, “외동딸로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물려받은 그녀([[고성 이씨 부인]])는 한양땅(지금의 서울)에 99칸 짜리 집을 사서 [[서성(조선)|서성]]을 키웠다”고 한다. |
− | 그러면서 [[서동량]] 박사는 “지금 사람들은 그녀( | + | 그러면서 [[서동량]] 박사는 “지금 사람들은 그녀([[고성 이씨 부인]])가 약밥과 술을 만들어 팔았다고 하는데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녀가 어릴 적 명문가 집에서 어머니로부터 배운 약밥 만드는 솜씨와 술 제조법을 눈으로 보고 배웠다”며 “서울에 온 그녀는 부친이 물려준 재산으로 99칸 집을 사서 [[서성(조선)|서성]]을 키웠으며, 음식 솜씨가 좋은 그가 방문하는 귀한 손님들에게 약밥을 대접한 것이 잘 못 알려 졌다”고 생각한다며 “당시 눈으로 볼 수 없는 신체적 여건과 함께 양반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로 이는 바로 잡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
그런 점에서 볼 때 “약밥과 술을 만들어 팔았다는 소문은 약밥과 술을 만들어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던 사람들이 훗날 그런 소문을 냈을 것이라며 바로 잡아 달라”고 말한다. | 그런 점에서 볼 때 “약밥과 술을 만들어 팔았다는 소문은 약밥과 술을 만들어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던 사람들이 훗날 그런 소문을 냈을 것이라며 바로 잡아 달라”고 말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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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당대에 사임당과 함께 맹모에 견줄만한 한국인의 어머니 교육의 힘은 [[서성(조선)|서성]] 대감을 정승과 대사헌에 이르게 한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 조선 당대에 사임당과 함께 맹모에 견줄만한 한국인의 어머니 교육의 힘은 [[서성(조선)|서성]] 대감을 정승과 대사헌에 이르게 한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 ||
−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 +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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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범석]](徐範錫 6선 국회의원) | ****************************** [[서범석]](徐範錫 6선 국회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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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동량]](대진대학교 교수) | ******************************** [[서동량]](대진대학교 교수) | ||
+ | ********************************* [[서울(포천)|서울]](徐蔚 동화작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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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임청각]](臨淸閣) == | ||
+ | [[임청각]]에서 세 명의 정승이 태어난다는 예언이 전해온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임청각]]에는 정승 두 명이 태어났습니다. 조선조 중엽의 [[서성(조선)|서성]] 선생(1558년-1631)과 조선조 말엽의 유후조 선생(1798-1876)이 그들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임청각의 외손으로 모친들이 친정에 와서 이들을 출산했던 것입니다. | ||
+ | [[서성(조선)|서성]] 선생의 어머니([[고성 이씨 부인]])는 이명 선생의 손녀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시각장애인었다고 합니다. [[서성]] 선생의 부친은 [[서해(조선)|서해]]라는 분인데 어려서 부친을 여의어서 숙부가 후견인이 되어 조카의 혼사를 진행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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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소호헌]](蘇湖軒) == | ||
+ | 안동 소호헌(安東 蘇湖軒)은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조선 중종 때 문신 [[서해(조선)|서해]](徐懈) 선생이 서재로 쓰기 위해 명종(재위 1545∼1567) 때 지은 별당이다. 1968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75호로 지정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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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부속된 방은 지붕 양식이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왼쪽 3칸은 대청, 오른쪽 1칸은 누마루며 앞쪽으로 온돌방 2칸을 붙여 집의 구조가 T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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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약주]](藥酒) == | ||
+ | 선조 때에 문신 [[서성(조선)|서성][(徐渻)의 집에서 빚은 술이 유명하였다. 그의 호가 약봉(藥峰)이었고, 그가 사는 곳이 약현(藥峴)이어서 좋은 청주를 약주라 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임원경제지』에서도 “서충숙공이 좋은 청주를 빚었는데 그의 집이 약현에 있었기 때문에 그 집 술을 약산춘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 약산춘이 약주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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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과 [[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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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조선)|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조선)|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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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약식]](藥食) == | ||
+ |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과 [[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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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조선)|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조선)|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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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약과]](藥果) == | ||
+ |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과 [[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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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조선)|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조선)|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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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약포]](藥脯) == | ||
+ |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과 [[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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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조선)|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조선)|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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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 ||
−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 +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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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같이 보기 == | ||
+ | * [[이천 서씨]] | ||
+ | * [[대구 서씨]] | ||
+ | * [[달성 서씨]] | ||
+ | * [[부여 서씨]] | ||
+ | * [[연산 서씨]] | ||
+ | * [[남양 서씨]] | ||
+ | * [[당성 서씨]] | ||
+ | * [[봉성 서씨]] | ||
+ | * [[절강 서씨]] | ||
+ | * [[중국 서씨]] | ||
+ | * [[일본 서씨]] |
2024년 2월 15일 (목) 14:38 기준 최신판
서동량(대진대학교 교수)
본관은 대구 서씨
종가집 위치:경기도 포천시 설운동 1-14번지
종가택을 지키는 서기원 옹(93세)의 아들 서동량 박사는 “그녀(고성 이씨 부인)는 남편이 죽고나서 아들 서성을 공부시키기 위해 안동에서 청주로 이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청주에서 아들 서성을 키우기에는 부족한 곳이라 생각되어 서울로 옮겼다”고 했다.
또, “외동딸로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물려받은 그녀(고성 이씨 부인)는 한양땅(지금의 서울)에 99칸 짜리 집을 사서 서성을 키웠다”고 한다.
그러면서 서동량 박사는 “지금 사람들은 그녀(고성 이씨 부인)가 약밥과 술을 만들어 팔았다고 하는데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녀가 어릴 적 명문가 집에서 어머니로부터 배운 약밥 만드는 솜씨와 술 제조법을 눈으로 보고 배웠다”며 “서울에 온 그녀는 부친이 물려준 재산으로 99칸 집을 사서 서성을 키웠으며, 음식 솜씨가 좋은 그가 방문하는 귀한 손님들에게 약밥을 대접한 것이 잘 못 알려 졌다”고 생각한다며 “당시 눈으로 볼 수 없는 신체적 여건과 함께 양반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로 이는 바로 잡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약밥과 술을 만들어 팔았다는 소문은 약밥과 술을 만들어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던 사람들이 훗날 그런 소문을 냈을 것이라며 바로 잡아 달라”고 말한다.
조선 당대에 사임당과 함께 맹모에 견줄만한 한국인의 어머니 교육의 힘은 서성 대감을 정승과 대사헌에 이르게 한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목차
가족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공. 종1품)
-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임청각(臨淸閣)
임청각에서 세 명의 정승이 태어난다는 예언이 전해온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임청각에는 정승 두 명이 태어났습니다. 조선조 중엽의 서성 선생(1558년-1631)과 조선조 말엽의 유후조 선생(1798-1876)이 그들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임청각의 외손으로 모친들이 친정에 와서 이들을 출산했던 것입니다. 서성 선생의 어머니(고성 이씨 부인)는 이명 선생의 손녀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시각장애인었다고 합니다. 서성 선생의 부친은 서해라는 분인데 어려서 부친을 여의어서 숙부가 후견인이 되어 조카의 혼사를 진행했습니다.
소호헌(蘇湖軒)
안동 소호헌(安東 蘇湖軒)은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조선 중종 때 문신 서해(徐懈) 선생이 서재로 쓰기 위해 명종(재위 1545∼1567) 때 지은 별당이다. 1968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75호로 지정되었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부속된 방은 지붕 양식이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왼쪽 3칸은 대청, 오른쪽 1칸은 누마루며 앞쪽으로 온돌방 2칸을 붙여 집의 구조가 T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약주(藥酒)
선조 때에 문신 [[서성(조선)|서성][(徐渻)의 집에서 빚은 술이 유명하였다. 그의 호가 약봉(藥峰)이었고, 그가 사는 곳이 약현(藥峴)이어서 좋은 청주를 약주라 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임원경제지』에서도 “서충숙공이 좋은 청주를 빚었는데 그의 집이 약현에 있었기 때문에 그 집 술을 약산춘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 약산춘이 약주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과 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약식(藥食)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과 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약과(藥果)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과 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약포(藥脯)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과 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