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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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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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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균(고려)|서균]] 묘지명(六世 徐鈞 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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所在 : 서울 國立中央博物館(No. 新 5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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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代 : 仁宗10年(金 天會10年,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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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高麗國卒朝散大夫判將作監事致仕濮陽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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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徐鈞其先利川郡人大宋淳化3年成宗卽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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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之12年契丹伐我入北鄙上幸安北將割地以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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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嶺爲關公之曾祖中書令章威公㬢‘獨發憤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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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力排其議方一戰自決未幾虜折簡召元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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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難之左右無可行者公慷慨義形於色因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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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行奏曰臣往則彼必退矣無勞聖情乃以孑然一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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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冒賊百万圍中與虜帥抗衡不屈指陣人義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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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爲之喪膽而遁國家至今全有西北千万里地賴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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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力也故家世皆以强蔭取卿相數矣而況公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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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厚莊重而有守其中者猶泰山莫之能移也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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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出宰于興礼中原大率寬平淸簡邑稱其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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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自後國家數遣使沙汰淸濁凡經郡牧者陰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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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投刺獨公自若也以如彼功力之後有如是德行之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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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位不過卿監世所惜也然猶桑楡之晩樂其退休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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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嘗有歉然之色而居常樂也內尤信大慈悲藏大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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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天會10年壬子春秋73無疾而登假11月3日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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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葬于白岳山之麓祖惟傑左僕射考靖平章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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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妣金氏平章事元鼎女也公娶李氏給事中唐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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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之女也生男六人生女四人次序名位鏤之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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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背矣銘曰 徐氏之世 于列有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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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惟公之偉 大臣之方 言寡行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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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動靜有常 陰功厚德 厥後必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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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誌其髣髴 庶幾無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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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長元成佛都監判官次穎觀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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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化寺□紫大師恭景靈殿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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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官次□□□□同正次□內侍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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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書郞同正次□春坊公子女四人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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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適金□之西面判官□辛丑冬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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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月先公而死次適王毅前試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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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部郞中次適李淑晨前內侍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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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尙衣直長次適高陽堅書籍店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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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事孫男九人孫女七人皆幼唯長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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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永□□爲春坊□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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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會壬子冬十一月 日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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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參 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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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東金石苑』 補遺2, 713-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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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金石總覽』上, 33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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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金石文追補』96(長元成佛都監 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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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金石全文』 中世上, 603-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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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東翼, 「高麗墓誌 4例 檢討」(『大丘史學』19,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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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균(고려)|서균]] 묘지명(徐鈞墓誌銘)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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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의 조산대부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고 돌아가신 복양공 [[서균(고려)|서균]]은 그의 선조가 이천군 사람이다. 송나라 순화3년(성종11, 서기 992년) 성종이 즉위한지 12년에 거란이 우리나라를 정벌하러 북쪽의 변방으로 침입하였다. 임금이 안북에 행차하여 땅을 떼어주어 절령으로 경계를 삼으려 하였다. 공의 증조 중서령 장위공 [[서희]](曦, 徐熙)가 홀로 분발하여 ᤝ힘써 그 논의를 배척하고 바야흐로 일전을 벌여 스스로 결정하고자 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오랑캐가 사신을 보내오자 원수를 불렀으나 ᤝᤝ어렵게 여겨 좌우에서 가히 갈만한 자가 없었다. 공이 강개하여 의로운 빛을 얼굴에 드러내며 이에 갈 것을 청하면서 아뢰었다. “신이 간다면 저들은 반드시 물러날 것이니, 성정을 수고롭게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내 홀연히 혼자 몸을 무릅쓰고 적의 백만 포위속으로 들어가서 오랑캐의 장수와 더불어 대항하며 뜻을 굽히지 않고 대의(人義)를 펼치지, 오랑캐가 그로 인하여 용기를 잃고 물러났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북지방의 천만리 땅을 온전하게 한 것은 공이 힘쓴 덕분이다. 그러므로 가문이 대대로 강한 음덕으로 경상이 된이가 여러명이다. 하물며 공([[서균(고려)|서균]](徐鈞)은 관대하고 너그러우며 장중하니, 그 중심을 지키는 것이 태산을 능히 옮기기 어려운 것과 같은 사람에 있어서이겠는가? 일찍이 흥례(興禮)와 중원(中原)에 수령으로 나갔을 때 대개 관대하고 공평하며 청렴하니 고을에서 그 다스림을 칭송하였다. 그 뒤 나라에서 여러차례 안찰사를 보내어 청탁을 가리게 하였는데 무릇 군목을 지내는 자들이 몰래 서로 명암을 주며 만나자고 하였으나 공만은 태연자약하였다. 그와 같은 공력(功力)이 있는 뒤에야 이와 같은 덕행의 업적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직위가 경(卿)과 감(監)에 지나지 않으니 세상에서 아쉽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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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히려 만년에는 물러나 쉬는 것을 즐기고, 일찍 서운해하는 기색이 없이 항상 기쁘게 생활하며, 안으로는 불교[대자비장(大慈悲藏)]를 더욱 믿었다. 大金 天會 10년 임자년(인종10, 1132)에 춘추 73세로 벽이 없이 돌아가시니 11월 3일에 백악산(白岳山) 기슭에 안장하였다. 조부 [[서유걸]](徐維傑)은 좌복야(左僕射)이고, 아버지 [[서정]](徐靖)은 평장사(平章事)이며, 어머니 김씨는 평장사 김원정(金元鼎)의 딸이다. 공은 이씨와 결혼하였는데, 급사중(給事中) 이당감(李唐鑑)의 딸이다. 아들 여섯명과 딸 네 명을 두었으니, 그들의 순서와 이름은 뒷면에 새겼다. 명(銘)하여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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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의 세계는 대대로 빛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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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공이 뛰어나 대신의 방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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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적으나 행동이 민첩하고 기거 동작이 일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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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을 감추고 덕을 후하게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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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손이 반드시 창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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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에 비슷하게 지(誌)를 지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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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하에 전해지기를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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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 큰아들 [[서원(고려)|서원]](徐元)은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이고, 차남 [[서영관]](徐潁觀)은 현화사(玄化寺) ᤝ자대사(ᤝ紫大師)이며, 3남 [[서공]](徐恭)은 경영전판관(景靈殿判官)이며, 4남 [[서순(고려)|서순]](徐諄)은 ᤝᤝᤝ同正이며, 5남 [[서성]](徐成)은 내시수서랑동정(內侍授書郞同正)이며, 6남 [[서염]](徐廉)은 춘방공자(春坊公子)이다. 딸은 네명인데, 장녀는 서면판관(西面判官) 金ᤝ之에게 시집갔으나 신축년(예종16, 1121) 겨울 10월에 공 보다 앞서 죽었다. 2녀는 전시병부랑중(前試兵部郞中) 왕의(王毅)에게 시집갔고, 3녀는 전(前) 내시시상의직장(內侍試尙衣直長) 이숙신(李淑晨)에게 시집갔고, 4녀는 서적점록사(書籍店錄事) 고양견(高陽堅)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9명, 손녀는 7명인데 모두 어리다. 다만 장녀 ᤝᤝ永ᤝᤝ春坊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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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회임자년(天會壬子年)(仁宗10,1132)겨울 11월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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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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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 가족 ==
 
== 가족 ==

2024년 3월 3일 (일) 14:49 기준 최신판

정의

고려 중기의 승려. 헌화사 대사를 지냈다.

출생-사망 ? ~ ?

서균 묘지명(六世 徐鈞 墓誌銘)

所在 : 서울 國立中央博物館(No. 新 5813)

年代 : 仁宗10年(金 天會10年, 1132)

1) 高麗國卒朝散大夫判將作監事致仕濮陽公

2) 徐鈞其先利川郡人大宋淳化3年成宗卽位

3) 之12年契丹伐我入北鄙上幸安北將割地以岊

4) 嶺爲關公之曾祖中書令章威公㬢‘獨發憤揮

5) □力排其議方一戰自決未幾虜折簡召元帥

6) □□難之左右無可行者公慷慨義形於色因請

7) 行奏曰臣往則彼必退矣無勞聖情乃以孑然一身

8) 冒賊百万圍中與虜帥抗衡不屈指陣人義虜

9) 爲之喪膽而遁國家至今全有西北千万里地賴其

10) 力也故家世皆以强蔭取卿相數矣而況公寬

11) 厚莊重而有守其中者猶泰山莫之能移也嘗

12) 出宰于興礼中原大率寬平淸簡邑稱其理

13) 自後國家數遣使沙汰淸濁凡經郡牧者陰相

14) 投刺獨公自若也以如彼功力之後有如是德行之實

15) 位不過卿監世所惜也然猶桑楡之晩樂其退休未

16) 嘗有歉然之色而居常樂也內尤信大慈悲藏大金

17) 天會10年壬子春秋73無疾而登假11月3日安

18) 葬于白岳山之麓祖惟傑左僕射考靖平章事

19) 妣金氏平章事元鼎女也公娶李氏給事中唐鑑

20) 之女也生男六人生女四人次序名位鏤之于

21) 背矣銘曰 徐氏之世 于列有光

22) 惟公之偉 大臣之方 言寡行敏

23) 動靜有常 陰功厚德 厥後必昌

24) 誌其髣髴 庶幾無疆

25) 長元成佛都監判官次穎觀玄

26) 化寺□紫大師恭景靈殿判

27) 官次□□□□同正次□內侍授

28) 書郞同正次□春坊公子女四人長

29) 適金□之西面判官□辛丑冬十

30) 月先公而死次適王毅前試兵

31) 部郞中次適李淑晨前內侍試

32) 尙衣直長次適高陽堅書籍店錄

33) 事孫男九人孫女七人皆幼唯長女

34) □□永□□爲春坊□使□

天會壬子冬十一月 日書

■ 參 考 ■

『海東金石苑』 補遺2, 713-716

『朝鮮金石總覽』上, 334-335

『韓國金石文追補』96(長元成佛都監 墓誌銘)

『韓國金石全文』 中世上, 603-606

張東翼, 「高麗墓誌 4例 檢討」(『大丘史學』19, 1981)

서균 묘지명(徐鈞墓誌銘) (번역문)

고려국의 조산대부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고 돌아가신 복양공 서균은 그의 선조가 이천군 사람이다. 송나라 순화3년(성종11, 서기 992년) 성종이 즉위한지 12년에 거란이 우리나라를 정벌하러 북쪽의 변방으로 침입하였다. 임금이 안북에 행차하여 땅을 떼어주어 절령으로 경계를 삼으려 하였다. 공의 증조 중서령 장위공 서희(曦, 徐熙)가 홀로 분발하여 ᤝ힘써 그 논의를 배척하고 바야흐로 일전을 벌여 스스로 결정하고자 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오랑캐가 사신을 보내오자 원수를 불렀으나 ᤝᤝ어렵게 여겨 좌우에서 가히 갈만한 자가 없었다. 공이 강개하여 의로운 빛을 얼굴에 드러내며 이에 갈 것을 청하면서 아뢰었다. “신이 간다면 저들은 반드시 물러날 것이니, 성정을 수고롭게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내 홀연히 혼자 몸을 무릅쓰고 적의 백만 포위속으로 들어가서 오랑캐의 장수와 더불어 대항하며 뜻을 굽히지 않고 대의(人義)를 펼치지, 오랑캐가 그로 인하여 용기를 잃고 물러났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북지방의 천만리 땅을 온전하게 한 것은 공이 힘쓴 덕분이다. 그러므로 가문이 대대로 강한 음덕으로 경상이 된이가 여러명이다. 하물며 공(서균(徐鈞)은 관대하고 너그러우며 장중하니, 그 중심을 지키는 것이 태산을 능히 옮기기 어려운 것과 같은 사람에 있어서이겠는가? 일찍이 흥례(興禮)와 중원(中原)에 수령으로 나갔을 때 대개 관대하고 공평하며 청렴하니 고을에서 그 다스림을 칭송하였다. 그 뒤 나라에서 여러차례 안찰사를 보내어 청탁을 가리게 하였는데 무릇 군목을 지내는 자들이 몰래 서로 명암을 주며 만나자고 하였으나 공만은 태연자약하였다. 그와 같은 공력(功力)이 있는 뒤에야 이와 같은 덕행의 업적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직위가 경(卿)과 감(監)에 지나지 않으니 세상에서 아쉽게 여겼다.

그러나 오히려 만년에는 물러나 쉬는 것을 즐기고, 일찍 서운해하는 기색이 없이 항상 기쁘게 생활하며, 안으로는 불교[대자비장(大慈悲藏)]를 더욱 믿었다. 大金 天會 10년 임자년(인종10, 1132)에 춘추 73세로 벽이 없이 돌아가시니 11월 3일에 백악산(白岳山) 기슭에 안장하였다. 조부 서유걸(徐維傑)은 좌복야(左僕射)이고, 아버지 서정(徐靖)은 평장사(平章事)이며, 어머니 김씨는 평장사 김원정(金元鼎)의 딸이다. 공은 이씨와 결혼하였는데, 급사중(給事中) 이당감(李唐鑑)의 딸이다. 아들 여섯명과 딸 네 명을 두었으니, 그들의 순서와 이름은 뒷면에 새겼다. 명(銘)하여 이른다.

서씨의 세계는 대대로 빛났지만

오직 공이 뛰어나 대신의 방략이 있었다.

말이 적으나 행동이 민첩하고 기거 동작이 일정하였다.

공적을 감추고 덕을 후하게 하니

그 후손이 반드시 창성할 것이다.

그 모습에 비슷하게 지(誌)를 지었으니

무궁하에 전해지기를 바라노라.

뒷면 큰아들 서원(徐元)은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이고, 차남 서영관(徐潁觀)은 현화사(玄化寺) ᤝ자대사(ᤝ紫大師)이며, 3남 서공(徐恭)은 경영전판관(景靈殿判官)이며, 4남 서순(徐諄)은 ᤝᤝᤝ同正이며, 5남 서성(徐成)은 내시수서랑동정(內侍授書郞同正)이며, 6남 서염(徐廉)은 춘방공자(春坊公子)이다. 딸은 네명인데, 장녀는 서면판관(西面判官) 金ᤝ之에게 시집갔으나 신축년(예종16, 1121) 겨울 10월에 공 보다 앞서 죽었다. 2녀는 전시병부랑중(前試兵部郞中) 왕의(王毅)에게 시집갔고, 3녀는 전(前) 내시시상의직장(內侍試尙衣直長) 이숙신(李淑晨)에게 시집갔고, 4녀는 서적점록사(書籍店錄事) 고양견(高陽堅)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9명, 손녀는 7명인데 모두 어리다. 다만 장녀 ᤝᤝ永ᤝᤝ春坊이 된다.

천회임자년(天會壬子年)(仁宗10,1132)겨울 11월에 쓰다

내용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증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할아버지: 서정(徐靖)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
    • 작은할아버지: 서존(徐存) (정3품 병부상서 태원군)
      • 아버지: 서균(徐鈞) (정2품 상서우복야.판장작감사)
        • 형: 서원(徐元)(정2품 평장사)
              • 원손자: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대광내의령 종1품)
        • 본인: 서영관(穎觀) (헌화사 대사)
        • 동생: 서공(徐恭)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
        • 동생: 서순(徐淳(徐諄) (종2품 동지추밀원사)
        • 동생: 서성(徐成) (정2품 평장사)
        • 동생: 서염(徐廉) (종2품 사복부령)


서씨일가연합회 [[1]]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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