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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된 10월 21일부터 연속으로 탄핵 상소가 올라갔다. [[서재창]]은 포도청에 감금된 뒤 수구파 내각이 장악한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당하고 의금부로 이송됐다가 12월 13일 참수형이 내려졌다. 이날 [[서재창]]은 박영효와 김옥균이 이끌던 독립당원들과 이창규, 오창모 등 네 명과 함께 금위영 국문장에서 끌어내어 군기시 앞길에서 능지처참했다. 그의 나이는 이제 19세였다. | 체포된 10월 21일부터 연속으로 탄핵 상소가 올라갔다. [[서재창]]은 포도청에 감금된 뒤 수구파 내각이 장악한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당하고 의금부로 이송됐다가 12월 13일 참수형이 내려졌다. 이날 [[서재창]]은 박영효와 김옥균이 이끌던 독립당원들과 이창규, 오창모 등 네 명과 함께 금위영 국문장에서 끌어내어 군기시 앞길에서 능지처참했다. 그의 나이는 이제 19세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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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셋째 형 [[서재필]]은 박영효, 김옥균 등과 함께 인천 제물포항에 정박중이던 일본인 선박에 숨었다가 겨우 일본 나가사키로 도피하였다. 주조선 일본공사관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주선으로 제물포까지 피신하였으나 출국 직전 변심한 다케조에가 이들을 내리라고 하여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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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양 남면 지실의 정해은에게 일찍 시집간 큰누나는 출가외인이라 하여 화를 피하였고, 여동생 서기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함경도로 피신했다. 이후 서기석은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후에 이씨 성을 가진 평민과 결혼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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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좌제는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던 친 외가에도 미쳤다. 가산은 탕진되고 가족은 이산되는 참변을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외사촌 형제인 이교문과 그의 손자 이용순은 살아남았고,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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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 [[서광효]]는 옥중에서 절곡 끝에 '만일 관노사령배가 문전에 오거든 잡혀가서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자결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였다. 맏형 서재춘은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고, 둘째 형은 관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관노사령들이 화석이 앞길에 나타난 것을 보고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마주보고 앉아 독약을 마셨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사망했지만 며느리는 못다 죽어 대청 대들보에 목을 매어 죽었다. 그러나 생모 성주이씨나 형수 광산김씨는 바로 죽지 않고 노비로 끌려갔다가 1885년 1월에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그의 서모 역시 관비로 끌려갔고 이복 동생들 역시 죽임을 당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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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의 가족은 몰살당했으나 기적적으로 피난했던 맏형 서재춘의 아들들 서찬석(徐灒錫, 1882년 - ?)과 서호석(徐灝錫), 동생 서재우의 아들 서호석(徐昊錫)이 겨우 살아남았다. 서재우는 나이가 어려 죽음을 면했다. | ||
+ | 서재우는 훗날 사면됐다. | ||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고려)|서한]](徐閈)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고려)|서한]](徐閈)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
2024년 2월 18일 (일) 19:50 판
서재필의 동생
서재창(徐載昌, 1866년 10월 29일 ~ 1884년 12월 13일)은 조선 말기의 군인, 정치인, 개화사상가로 서재필의 동생이다. 서재창은 1866년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528번지 가내마을(현재의 보성군 문덕면)에서 당시 동복군수이던 서광효와 이기대(李基大)의 다섯째 딸 성주 이씨의 5남 2녀 중 넷째 아들( 또는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영조의 장인인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8대손으로, 연잉군을 추대하려다가 죽은 서덕수와 정조 때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서용보가 그의 선조들이었다.
위로 친형 서재춘과 7촌 아저씨 서광하의 양자로 간 서재필 등이 있었고, 누나 1명과 여동생 1명이 태어났다. 그밖에 서모에게서 태어난 이복 형 서재형이 있었다. 큰누나 서씨는 그가 태어날 무렵을 전후해 담양군에 사는 영일 정씨 정해은(鄭海殷)과 결혼하여 전남 담양군 지실마을로 시집갔다.
어릴 때 7촌 아저씨 서광하의 양자로 간 셋째 형 서재필 등과 박규수, 유대치의 문하에 출입하며 개화사상을 접하고 어윤중, 유대치, 이동인 등의 권고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 군사학과 영어와 양잠학 등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농업학교 설립을 추친하였다.
서재창은 1884년 19세에 사직동에 살던 보국숭록대부를 지낸 서상우(徐相雨)의 양손자로 입양되었다
1884년(고종 21년) 1월부터는 7개월간은 토야마 육군 유년학교(戶山陸軍學校)에서 신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 약 7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7월 수료하였다. 이후 정6품의 품계를 받고 무위영 별기군 작전관에 보직되어 조선의 군인으로 복무하였으며 귀국 직후부터 상중이던 형 서재필, 박영교 등과 군사의 동원을 준비하였다. 그해 10월 11일 우정국 개설 2개월 전에 우정국 사사(司事)에 임명되어 우정국 개설 업무에도 관여하였다. 1884년 12월 김옥균, 서광범, 형 서재필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연락하여 군사를 동원하였다.
박영교, 홍영식 등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피신한 곳을 맡고, 서재창은 한성부로 잠입하는 청나라군대와 싸웠으나 병력은 전멸당하고 패주한다. 갑신정변이 3일 만에 실패하면서 체포된 이희정(李喜貞)·김봉균(金奉均)·신중모(申重模)·이창규(李昌奎), 이윤상(李允相), 오창모(吳昌模), 차홍식(車弘植), 남흥철(南興喆), 고흥종(高興宗), 이점돌(李點乭), 최영식(崔英植) 등이 처형당한다.
체포된 이들이 처형당하자 그는 은신, 도피했으나 도피 과정에서 수색 중이던 관군에게 잡혀 의금부에 투옥된 뒤 정변에 참여한 죄로 국문후 처형당했다. 서재창은 처형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변복한 뒤 상노를 앞세우고 도주하던 중 붙잡혀 10월 21일 포도청(捕盜廳)에 감금당했다.
체포된 10월 21일부터 연속으로 탄핵 상소가 올라갔다. 서재창은 포도청에 감금된 뒤 수구파 내각이 장악한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당하고 의금부로 이송됐다가 12월 13일 참수형이 내려졌다. 이날 서재창은 박영효와 김옥균이 이끌던 독립당원들과 이창규, 오창모 등 네 명과 함께 금위영 국문장에서 끌어내어 군기시 앞길에서 능지처참했다. 그의 나이는 이제 19세였다.
셋째 형 서재필은 박영효, 김옥균 등과 함께 인천 제물포항에 정박중이던 일본인 선박에 숨었다가 겨우 일본 나가사키로 도피하였다. 주조선 일본공사관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주선으로 제물포까지 피신하였으나 출국 직전 변심한 다케조에가 이들을 내리라고 하여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담양 남면 지실의 정해은에게 일찍 시집간 큰누나는 출가외인이라 하여 화를 피하였고, 여동생 서기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함경도로 피신했다. 이후 서기석은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후에 이씨 성을 가진 평민과 결혼했다.
연좌제는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던 친 외가에도 미쳤다. 가산은 탕진되고 가족은 이산되는 참변을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외사촌 형제인 이교문과 그의 손자 이용순은 살아남았고,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아버지 서광효는 옥중에서 절곡 끝에 '만일 관노사령배가 문전에 오거든 잡혀가서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자결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였다. 맏형 서재춘은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고, 둘째 형은 관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관노사령들이 화석이 앞길에 나타난 것을 보고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마주보고 앉아 독약을 마셨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사망했지만 며느리는 못다 죽어 대청 대들보에 목을 매어 죽었다. 그러나 생모 성주이씨나 형수 광산김씨는 바로 죽지 않고 노비로 끌려갔다가 1885년 1월에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그의 서모 역시 관비로 끌려갔고 이복 동생들 역시 죽임을 당했다.
그의 가족은 몰살당했으나 기적적으로 피난했던 맏형 서재춘의 아들들 서찬석(徐灒錫, 1882년 - ?)과 서호석(徐灝錫), 동생 서재우의 아들 서호석(徐昊錫)이 겨우 살아남았다. 서재우는 나이가 어려 죽음을 면했다. 서재우는 훗날 사면됐다.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徐閈)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목차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성(徐渻 판중추부사 종1품)
가족 계보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공. 종1품)
-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송재문화제(松齋文化祭)
보성군은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창립 등 활동으로 조국의 자주독립에 평생을 바친 송재 서재필 선생을 기리는 ‘송재 문화제'를 개최했다.
서재필기념공원(徐載弼記念公園)
주암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강건한 삶을 살았던 독립투사 송재 서재필 선생의 유혼이 머무는 공간이다. 18세 나이로 갑신정변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던 서재필은 그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신문을 제작하고 독립문을 만들었으며,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쳤던 이다. 그가 태어난 문덕면 생가 앞에는 기념공원을 건립하여 추모하고 그의 정신이 살아있는 독립문을 재현하고 유품 8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이 지역은 보성군의 북부 지역으로 천년고찰의 대원사와 향토작가 전시관인 백민 미술관 그리고 주암호반, 승주 고인돌공원과 연계되어 교육문화관광코스로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