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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15일 (토) 07:50 판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당시부터 우리나라에 대해 적극적으로 차관공여(借款供與)를 제기하여 두 차례에 걸쳐 각 30만 원과 3백만 원의 차관을 성립시켰다. 이러한 일본의 차관 공세는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이후 더욱 노골화되었다.
이때 일본이 우리나라에 차관 공세를 펴는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한국의 재정을 일본 재정에 완전히 예속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차관으로 식민지 건설을 위한 정지 작업(整地作業)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에 의하여 제1차 한일협약 이후 우리나라에 재정 고문으로 부임한 메카타(目賀田種太郎)는 1906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1,150만 원의 차관을 도입하였다.
제1차 차관은 1905년 1월 ‘폐정리자금채’라는 명목으로 해관세(海關稅)를 담보로 한 3백만 원이었다. 제2차 차관은 1905년 6월 우리 정부의 부채 정리와 재정 융통에 필요한 자금 명목으로 한국의 국고금을 담보로 2백만 원을 들여왔다.
제3차 차관은 1905년 12월 우리나라의 토착 자본을 일본 자금에 예속시킬 목적으로 금융자금채 150만원을 들여왔다. 제4차 차관은 1906년 3월 기업자금채의 명목으로 5백만 원을 들여왔다.
이러한 일본측의 차관 공세는 우리 정부와 민간의 경제적 독립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당시 우리나라의 토착 자본은 일본 차관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07년 2월 중순대구의 광문사(廣文社) 사장 김광제(金光濟)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은 단연(斷煙)을 통하여 국채를 갚아 나가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였다.
당시의 광문사는 지식인과 민족 자산가로 구성되어, 주로 실학자들의 저술을 편찬하고 신학문을 도입하여 민족의 자강 의식을 고취하고 있던 출판사였다.
또, 서상돈은 일찍이 독립협회 회원과 만민공동회 간부로서 자주독립 운동에 참여해 온 인사였다. 김광제ㆍ서상돈은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국채 1천 3백만 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고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고 발기 취지를 밝혔다.
취지문을 발표한 뒤 대동광문회(大同廣文會 : 대구 광문사)는 민회소(民會所), 즉 단연회(斷煙會)를 설립하여 직접 모금 운동에 나섰다. 대동광문회의 국채보상운동 발기가 『대한매일신보』ㆍ『제국신문』ㆍ『만세보』ㆍ『황성신문』 등에 보도되자 각계각층의 광범한 호응이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2월 22일김성희(金成喜) 등이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를 설립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기성회는 회칙까지 제정하여 본격적인 운동의 채비를 갖추었다. 또, 수전소(收錢所)는 서점ㆍ약국ㆍ대한매일신보사ㆍ잡지사 등으로 지정하였다.
그 뒤 전국에서 ‘국채보상’의 이름을 붙인 20여 개에 달하는 국채보상운동단체가 창립되었다.
이들 단체의 운동은 국채 보상을 위한 계몽적 활동과 직접 모금 운동을 하는 실천적 활동으로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나눌 수 있다.
운동에는 문자 그대로 각계각층이 참여하였다. 고종도 단연의 뜻을 밝혔고, 이에 따라 고급 관료들도 한때 소극적이나마 모금 운동에 참여하였다.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민족 자본가와 지식인층이었다.
상인들은 일본 차관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당사자들이었기 때문에 인천ㆍ부산ㆍ원산ㆍ평양 등지에서 상업회의소 등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활동에 참여하였다.
지식인들은 각종 단체ㆍ학회ㆍ학교ㆍ언론기관 등을 중심으로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운동에는 신지식인뿐만 아니라 유림(儒林)과 전ㆍ현직 하급관리들도 각 지방에서 상민층과 함께 적극 참여하였다.
또, 이 운동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많은 부녀 층이 참여하여 각종 패물을 의연소(義捐所)에 보내 온 점이다. 그리고 노동자ㆍ인력거꾼ㆍ기생ㆍ백정 등 하층민들까지도 적극 참여하여 이 운동은 그야말로 범국민적 운동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907년 4월부터 12월까지였다. 특히, 6월∼8월에는 가장 많은 의연금이 모아졌다. 그러나 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운동주체역량의 부족으로 인하여 1908년에 들어서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운동을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꾸준히 추진해 간 중심체는 양기탁(梁起鐸)과 베델(Bethell, E.T.裵說)이 이끄는 대한매일신보사였다. 따라서, 이 운동은 사실 국권회복운동의 하나로서 전개되고 있는 셈이었고, 이에 일제는 갖은 방법을 다하여 방해, 탄압하려 들었다.
일제는 1907년 이후 베델을 국외로 추방하는 공작을 펴, 1908년 5월 3주(週)의 금고와 벌금형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통감부 당국은 “대한매일신보가 보관한 국채보상금을 베델ㆍ양기탁 두 사람이 마음대로 하여 3만원을 소비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양기탁을 구속해 버렸다. 이른바 일제는 ‘국채보상금소비사건(國債報償金消費事件)’을 조작한 것이다.
통감부의 공작에 따라 전 국채보상지원금 총합 소장이었던 윤웅렬(尹雄烈)은 “보상금 중 삼만 원을 영국인 베델이 사취하였으므로 그 반환을 요청한다.”는 반환청구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이를 근거로 운동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감을 민중들에게 심어 주고자 하였다.
양기탁은 공판 결과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통감부의 공작으로 운동의 주체는 분열되어, 운동 자체가 암초에 부딪쳐 끝내는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국채보상운동은 처음부터 순수한 애국 충정에서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서, 전국적인 통일된 지휘체계 하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일제의 방해ㆍ탄압 책동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끝내 좌절되었던 것이다. 운동이 비록 좌절로 끝나긴 하였으나 국권 회복을 위한 투쟁의 하나로서 그 역사적 의의는 큰 것이었다.
1851(철종 2)∼1913. 민족운동가.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 서씨 시조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목차
생애 및 활동사항
일명 서상돈(徐相敦). 세례명은 아우구시티노. 출생지는 대구.
생애 및 활동사항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 가문이 되었고,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강원도와 충청도로, 1839년(헌종 5) 기해교난 때는 경상북도 문경·상주 등지로 피난, 1859년(철종 10) 대구에 정착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교난 때는 신앙문제로 문중에서 쫓겨나고 가산도 탕진해버렸다. 1871년 대구로 돌아온 뒤 독학을 하면서 지물(紙物) 행상 및 포목상을 시작하였다. 1886년경 상당한 재벌로 부상했으며, 이후 정부의 특명으로 경상도시찰관에 임명되었다.
이 때부터 대구교회 로베르(Robert, A. J., 金保祿)신부를 중심으로 교회발전에 힘썼다. 시찰관에서 퇴임한 뒤 실업계의 중진으로 대구의 경제권을 좌우할 만큼 갑부 대열에 들었다. 그 뒤 대구교구가 설립되자 이의 발전에 힘쓰면서 성직자 돕기와 수녀 보호에 솔선수범하였다.
한편, 외세의 국권침탈에 맞서 이의 수호에 앞장선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약했는데, 독립협회 제4기 민중투쟁기에는 재무부과장 및 부장급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2월 16일 대구 광문사(廣文社)에서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마친 뒤, 광문사 부사장으로서 담배를 끊어 당시의 국채 1300만환을 보상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이 자리에 참석한 회원들이 2,000여 환을 갹출하고,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로 하고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하였다.
그 요지는 국채 1300만환은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된 것으로, 2000만 국민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하지 않고 그 대금 20전씩을 거둔다면 1300만환을 모을 수 있으며, 나머지는 특별모금한다는 것이었다.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 등과 함께 전개한 국채보상운동은 『황성신문(皇城新聞)』·『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제국신문(帝國新聞)』 등을 비롯한 민족언론기관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때 모인 자금은 그 뒤에 전개된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쓰였다
상주 이안에 최초로 입향한 성도(聖徒) 서광수(徐光修)
상주 이안에 최초로 입향한 성도(聖徒) 서광수(徐光修)
상주시 이안면 양범리 산 18
상주 함창에서 지방도 32호선을 따라 서쪽으로 달리면 함창향교를 지나 이안면 소재지 사거리 교차로를 만난다. 여기서 서쪽으로 조금 더 나아가면 왼쪽에 아담하고도 정겨운 마을을 만난다. 본래 함창군 상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안면에 편입되었으며, 산과 산으로 둘러싸인 구릉성 평지에 자리하고, 마을 뒷산의 모양이 조개같이 생겼다고 하여 패릉(貝陵)이라고도 하며, 그 지형이 뱀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양배미기’라 불리다가 변하여 ‘양범리’로 되었다. 이 마을이 바로 배모기 교우촌(敎友村) 터이고, 현재는 이안면 양범2리(良凡二里)로 전주 이씨(全州李氏) 집성촌(集成村)이다.
문헌상으로 볼 때 최초로 천주교를 신봉한 사람은 허균(許筠, 1569~1618)이지만, 학문으로서 천주교를 연구하고 신앙으로 실천한 사람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제자 농은(隴隱) 홍유한(洪儒漢)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후 1784년 이승훈 베드로(李承薰, 1756-1801년)가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서 전교 활동을 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되었다. 실제로 그 이듬해인 1785년 3월 명례방(明禮坊) 앞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 토마스 1751-1786)의 집에서 신앙집회가 있을 때, 형조(刑曹)의 순라군(巡邏軍)에게 발각되어, 형조판서(刑曹判書) 김화진(金華鎭, 1728~1803)의 심문(審問)을 받게 되는데, 이 사건이 유명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다. 이로써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으며, 이때 사대부집 자제들은 훈방 조치하고, 김범우는 체포하여 경남 밀양의 단장(丹場)으로 귀양을 보냈는데, 매 맞은 상처로 인하여 1786년 가을에 옥사하니 첫 순교자이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문중 박해를 피해 서광수(徐光修, 1715~1786)가 다섯째 아들 서유도(徐有道)와 함께 상주 상서면의 배모기로 입향(入鄕), 은거함으로써 상주 북부지방에 천주교 신앙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 당시 그의 가문에서는 그와 그의 자녀들이 천주교에 입교하자 문중 회의를 열고, 족보에서 파적(破籍) 시켜 버렸다고 한다. 천주교가 상주 지방에 처음 소개된 것은 아마도 18세기 실학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남인 학자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성도(聖徒) 서광수는 용안 현감(龍安縣監)을 지낸 서명함(徐命涵)의 장남으로, 그의 집안은 누대로 내려오는 대구 서씨(達城徐氏)로 한양에서 높은 벼슬을 하고 많은 학자를 배출한 명문대가였다. 서광수는 덕수 이씨(德水李氏)와의 사이에 6남(六男: 서유홍(徐有弘), 서유오(徐有五), 서유만(徐有萬), 서유원(徐有元), 서유도(徐有道), 서유필(徐有弼)을 두었으며, 1786년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서유도(徐有道)는 이곳에서 몇 년간 살면서 복음을 전파하여 부근의 사실(상주 이안면 대현리) · 은재(문경 가은읍 저음리) · 한실 잣골(문경 마성면 상내리) · 감바우(상주 아천리) 등에 옛 교우 촌이 있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문경 한실로 피난을 갔다.
이안면 양범리 실개천을 앞에 둔 야산 어귀에는 서광수와 5남 서유도 내외의 만년유택(萬年幽宅)이 소재하는바, 묘표 명문(銘文)에는「聖徒 達城徐公諱光修之墓」와「聖徒 達城徐公諱有道 配孺人醴泉林氏之墓」라 새겼고, 이면에는 아들과 손자들을 기록했다. 입구에는 동(銅)으로 조각한 예수님의 대형 십자가상과 야외제대가 있으며, 맨 위에는 「INRI」라 걸었는데, ‘나자렛 사람 예수’를 말함이다. 1996년 묘지 성역화 이후 한때는 많은 사람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지금은 조금 쓸쓸해 보인다.
당시 서광수의 아들을 살펴보면 장남 서유홍(徐有弘)은 순천으로, 차남 서유오(徐有五)는 청풍으로 갔다가 후에 문경 여우목으로, 삼남 서유만(徐有萬)은 김제로, 사남 서유원(徐有元)은 공주로 흩어져 피하고, 육남 서유필(徐有弼)은 남원 부사가 되었다. 현재 손자 서치보(徐致輔, 2남 서유오의 장남)와 증손자 서인순(徐隣淳, 2남 서유오의 장손)의 묘소는 문경 여우목 성지(문경시 문경읍 증평리) 내에 있다. 서치보(徐致輔)는 5명 아들인 서인순(徐隣淳)·서명순(徐名淳), 서철순(徐哲淳 바오로), 서익순(徐翼淳 요한), 서태순(徐泰淳) 베드로 이끌고 경상도 문경현 여우목 교우촌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서상돈의 아버지가 되는 서철순은 다시 가족을 이끌고 경상도 김산군 군내면 마좌산리 마잠에 정착하였고 이 곳에 살다가 서상돈과 그의 동생 서상정(徐相定)을 낳았다. 이후 그의 가족들은 경상도 상주목 청동면 석단리[10] 교우촌으로 다시금 이주하였는데 1857년 10월 6일 부친이 이 곳에서 별세하자 서상돈은 1859년경 어머니·동생과 함께 대구도호부 성서면 새방골 죽전[11]으로 이주하여 인근에 살던 외조부에게 의탁했다.
1907년 광문사 문회에서 나라의 빚을 갚고, 국권을 지키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을 할 것을 발의한 서상돈(徐相焞, 1850~1913)은 현손(3남 서유오의 증손)으로, 대구 본당과 대구 교구 설립 초기에 그 기반을 다지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는 13세 때 집 근처 어느 상인의 심부름꾼으로 들어가 점차 장사일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18세 되던 해 대구에서 천주교 원로회장 서용서(徐用瑞)의 후원과 보부상의 거두인 최철학, 외사촌형 김종학 등 천주교인들의 도움으로 보부상을 시작했다. 그의 사업은 점점 번창하여 고령현 개포를 본거지로 삼고 동래도호부에서 안동대도호부까지 800리에 달하는 사업 영역을 가진 보부상 800명을 거느리는 대구에서 손꼽히는 거상이 되었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그는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군위현, 김산군, 칠곡도호부, 대구도호부 등의 토지를 매입하여 대지주로 변신하게 된다. 등짐을 지고 재래시장을 전전하던 소년은 35세가 지날 무렵 대구도호부 지역의 유력한 경제인 중의 1명이 되어 있었다.
상주지역은 천주교가 영남지방으로 전래하는 최초의 지역일 뿐 아니라 전 지역으로 확산하게 되는 통로 역할을 한 곳이다. 특히 상주 시내에는 목사(牧使)의 아문(衙門)이 있었기 때문에 신유(辛酉, 1801)·을해(乙亥, 1815)·정해(丁亥, 1827)·기해(己亥, 1839)·경신(庚申, 1860)·병인(丙寅, 1866)박해 등 역대 박해 때마다 문경, 상주 등지에서 체포되어 온 신자들이 관아에서 영장에게 문초를 받다가 사망하거나 감옥에서 옥사하거나 형장에서 참수를 당하여, 이 지방에 살던 많은 신자가 순교하였다.
이처럼 현재 천주교와 관련한 사적지는 서광수 부자 묘소와 상주 시내 옥 터(성동동)와 형장(刑場, 옥 터 바로 옆 옛 소전골과 상주소방서와 서문동 성당 부근), 계산동 천주교 공동묘지, 청리 서산(西山)의 화형(火刑) 터, 삼괴리 신앙 고백비(信仰告白碑) 등과 퇴강성당(지방문화재자료 제520호)이 있는데, 이들은 역사성과 물증이 충분하기에 조화롭게 잘 연결하면 훌륭한 성지(聖地)로 탈바꿈되어 많은 사람으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가족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성(徐渻 판중추부사 종1품)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國債報償運動紀念公園)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東仁洞)에 있는 공원.
서상돈 고택(徐相敦故宅)
위치: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6-1
대구시는 계산동 이상화 고택 옆에 있었던 서상돈의 생가를 복원하였고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을 조성하고 동상을 세우는 등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서상돈 묘소(徐相敦墓所)
서상돈선생묘소가는방법
1.가톨릭범물공원묘원에 주차
2.범안로 안심방향 20m가량 직진
3.서상돈묘소입구 팻말 옆 성묘객 통행로로 진입
4. 진입하자마자 두갈래 소로 중 왼쪽길로 진입
5.왼쪽길 등선따라 40m가량 올라가면(가파름) 양갈래길이 나옴
오른쪽길 따라 5m정도 진입하면 바로 서상돈 선생묘소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