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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8일 (화) 20:20 판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한국 기독교 초기 전도자이자 목사.
대구 서씨 집안의 두 형제 서상륜과 서경조는 한국교회에서 잊을 수 없는 두 인물이다. 형 서상륜은 활달하고 사교적이며 사업가적인 기질을 가진 외향적인 사람으로서 장사를 통해 출구를 찾으려 하였던 반면 동생 서경조는 내향적인 학자풍의 사람으로서 사물을 깊이 성찰하고 생각이 깊은 인물로서 대조적이었다.
서경조는 1852년 12월 14일 의주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본명은 상우(相祐)이고, 경조는 자(字)였다. 서경조는 형 서상륜(1948년 7월 26일생)보다 더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었다. 그리하여 정상적인 학교교육은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한문을 익혔으나 한서를 탐독할 수 있을 정도로 한문에 대한 조예가 있었다.
서경조의 기독교 입문은 크게 3단계로 이루어진다. 제1단계는 형 서상륜을 따라 만주를 왕래하며 기독교를 접하고 기독교인들의 겸손한 모습에 대한 감동에서 출발한다. 제2단계는 기독교 서적을 통한 지식습득의 단계이다. 서경조는 형과는 다르게 학자적인 관심에서 중국인과 서양인이 합작으로 경영하는 중서서원(中西書院)에서 많은 서적을 보면서 신문화의 위대함을 배우고 동시에 기독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제3단계는 형과 함께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구미리 솔내로 이주하여 솔내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과정이다.
형을 따라 간 곳에서 로스(John Ross)가 보내 준 6천권의 성경 중 신약전서와 덕혜입문 등을 전해 받고 성경을 탐독하기 시작한 서경조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자신의 죄와 속죄의 도리를 깨닫게 됐으며, 최후로 성령과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함으로써 신앙을 갖기로 결단한다. 서경조의 입신(入信)과정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걸었던 대다수의 과정을 보여주는 본보기였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솔내는 그에게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서경조는 1887년에 세례를 받고 1919년 중국으로 떠나기까지 약 30년을 목회자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특징을 갖는다. 지금까지의 기록상 서경조는 1887년에 봄에 서울에서 혹은 가을에 솔내에서 언더우드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 수 있다. 이후 1888년부터 서경조는 선교사의 권서(勸書: colpoteur)와 조사(助師: helper)로 발탁되어 황해도 장연지방의 지도자로 일하기 시작한다. 언더우드는 서경조를 초창기 한국인 선교 파트너로 신뢰하고 있었고 서경조에게는 황해도 솔내교회로 부름받았다는 확고한 소명의식이 있었다. 여러 선교사들로부터 인정받는 한국인 동역자(조사/권사)가 됨으로써 자신의 삶이 오히려 좋아질 수 있었으나, 이를 거부하고 오로지 솔내교회로만 향하였던 서경조에게서 우리는 신앙인 혹은 교회 지도자로서의 곧은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서경조목사의 지도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첫째는 그의 학자적인 태도에서 나오는 성경탐독과 성경교사로서의 유능함이며, 둘째는 공의회로부터 독노회와 총회에 이르는 기간에 보여준 그의 서기관으로서의 유능함이며, 셋째는 감사할 줄 아는 제안자였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다.
서경조는 1904년에 평양신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수업을 받고 1907년 9월 19일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목사임직을 받는다. 7명의 신임 목사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서경조는 목사를 대표하여 축도하는 순서를 맡음으로써 한국인 최초의 축도 목사로서의 영예를 가졌다. 서경조목사의 공헌은 아무래도 유능한 서기로서의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공의회에 참석하여 한글 회의록을 치밀하게 남겨둠으로써 후대에 '서기록'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본보기가 됐다.
한편 언더우드와 함께 서울에서 동사 순회 전도목사로 사역하는 동안 어느 덧 서경조의 나이가 회갑을 넘기게 되었다. 이 시기에 60세를 넘긴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음을 감안할 때, 서경조는 1913년에 사역을 중단하고 제2의 고향인 솔내로 귀향하여 은퇴자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서경조목사의 지도력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의리의 목회자이며 첫 부르심에 충실한 목회자이다. 두번째로 그는 공의회와 노회의 서기로서 기록의 중요성을 상기시킨 목회자이다. 세번째로 그는 추수감사절 제정을 주창함으로써 은혜를 아는 목회자였다. 네번째로 그는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이민을 결정하고 해외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자녀들의 독립활동을 지원한 목회자였다.
물론 서경조 목사의 지도력은 자신의 목회활동과 더불어 가혼으로 사돈이 된 솔내지방의 김성첨 가문의 자녀들과 더불어 양 집안의 후손들의 영향력은 한국과 해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서경조 목사가 동료 7인의 목회자 가운데에서 비교적 빠르게 한국을 떠나 1919년부터 중국에서 생활함으로써 목회자로서 그의 활동은 1887년으로부터 1919년까지 한국에서 그리고 나머지 1919년으로부터 1938년에 이르는 기간은 중국에서 보이지 않는 영향력으로 남아 있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한국교회에 더욱 더 크게 영향력을 끼칠 수 없었던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목차
활동
서경조(徐景祚)[1852~1938]는 1852년 평안북도 의주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만주에서 상업에 종사하던 중 기독교 신자가 된 형 서상륜(徐相崙)의 전도로 신자가 되었고, 형과 함께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한국 최초의 교회로 일컬어지는 소래교회[송천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후 서울로 이주하여 1887년 봄에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에게 세례를 받고, 1888년부터 언더우드의 조사 및 권서인으로 황해도 장연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1893년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배위량(裵緯良), 1862~1931]의 초청으로 4월 17일부터 5월 20일까지 약 1개월간 베어드와 함께 400마일에 달하는 순회 전도 여행을 다니며 부산과 인근 지방 전도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서경조는 한국 최초의 장로가 되어 황해도 지방의 교회 설립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190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서울의 새문안교회에서 협동 목사로 일하다가, 1913년 사임하였고, 1916년 서울 안국교회에서도 잠시 목회 활동을 하다가 곧 사임하였다.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투신한 둘째 아들 서병호(徐丙浩)와 함께 남은 삶을 보내다 1938년에 세상을 떠났다. 큰 아들은 서동원(徐東元 1901-1950 목사).
한국 최초 개신교 소래교회 설립자 서경조
한국 최초 개신교 목사 서경조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