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조선"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1번째 줄: 1번째 줄:
 
[[서우여]](徐于餘)  [[기자조선]](奇子朝鮮)
 
[[서우여]](徐于餘)  [[기자조선]](奇子朝鮮)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
+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
  
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
+
[[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
  
 
기자조선의 영역
 
기자조선의 영역
  
  
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
+
[[동이족]](东夷)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왕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
  
  

2022년 10월 7일 (금) 13:06 판

서우여(徐于餘) 기자조선(奇子朝鮮)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

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

기자조선의 영역


동이족(东夷)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왕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