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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고종 4)∼1909(순종 2). 조선 말기의 의병장.[[달성 서씨]]
 
1867(고종 4)∼1909(순종 2). 조선 말기의 의병장.[[달성 서씨]]
  
이강년이 와서 합하여 무릇 48진, 약 1만에 달하였음. 허위를 군사(軍師)로, 이강년을 호서장(湖西將)으로, 이태영(李泰榮)을 진동장(鎭東將)으로, 김준수(金俊洙)를 안무장(安撫將)으로, 연기우(延起羽)를 대대장(大隊長)으로 삼아 바야흐로 경성에 들어가려고 하여 약 30리 지점에 달하였음. 이 동안 전투가 38회에 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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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의병 전쟁에 참여한 양산의 서병희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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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였던 양산 상북면 대석리 출신 의병 서병희가 울산 경주 접경지역에서 윤정의(尹政儀) 의병부대에 1908년 3월경 합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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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희(徐丙熙, 徐炳熙, 1867~1909)는 1867년 양산군 중북면 좌삼리(현 양산시 상북면 좌삼리 97번지)에서 달성 서병권(徐柄權)과 청주 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영호(榮浩), 자는 경운(敬運)이다. 서병희는 키가 크고 마른 편으로 다소 학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경남 양산(梁山)에서 한의업을 경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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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희는 “융희 원년(1907) 8월 광무황제[韓皇]의 양위가 되고 계속하여 일한협약(日韓協約, 정미7조약)이 체결이 되어 내치외교(內治外交) 모두 일본의 간섭을 받고 그 보호 하에 서게 된 것은 오로지 송병준(宋秉畯)이가 일진회(一進會)를 인솔하여 때에 이토 히로부미 통감[伊藤統監]과 모의 결행한 것이라” 보았다. 이것은 “5백 년 이래 독립인 한국의 사직(社稷, 나라)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깊이 생각[思料]”하였다. 이러한 국란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우국(憂國)의 지사(志士)와 결사(結事)를 거사(擧事)하고자 애태우던[焦慮] 중 우연히 허위(許諱)라는 사람이 [거병의] 음모(陰謀)가 있음을 알고 동년 음(陰) 10월 허위의 부하(部下)에 들어가서 허위로부터 서병희의 재주가 있음를 알고 대접[知遇]을 얻어서 동년 음(陰) 11월까지는 오로지 음모단(陰謀團, 의병) 동지[同士]의 결합에 분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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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희는 1907년 음력 10월 허위의 부대에 들어가서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음력 11월에 의병 동지들을 결합하였다. 허위 의병부대는 경기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하며 항일 의병 전쟁을 수행하였다. 12월에 이르러서는 그 세력이 수천 명에 달했다. 허위는 “종전의 춘추대의에 의해 봉기하였던 의병투쟁을 자주적 민족 보존과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 의병 투쟁으로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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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각지에서 16개 의병부대[의진義陣]가 합세하여 8000명의 연합부대가 형성되었다. 11월 경기도 양주로 옮겼을 때 의병장 허위, 이강년을 비롯한 48개 의병부대 약 1만 명 규모로 증가하였다. 이 중에 해산군인이 300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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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의병부대가 결성된 뒤 통합군 사령부[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陳所)]를 설치하여 서울 진공을 하기로 합의하고,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허위를 군사장으로 추대하였다. 연합의병부대는 본격적인 서울진공작전을 개시하였다. 1월 초 군사장 허위는 300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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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이인영진술조서’에서 서울진공작전의 개요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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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8월 그는 3진(陣)의 장(將)으로 8도에 격문을 보내 병사를 소집하고 정부 백관의 죄악을 헤아려 통감 및 각국 총영사에게 글을 보내 일본이 전약(前約: 시모노세키조약-필자 주)을 어기는 행위가 있음을 호소하였음. 그러는 사이에 지평(砥平)에 이르자 16진의 병사를 합하여 8천여 명에 달하였는데, 군사를 머물게 하고 2개월간 통감의 회답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음. 이 동안 3차례의 접전하였음. 11월에 이르러 홍천, 춘천을 거쳐 양주에 이르자 이때 허위, 이강년이 와서 합하여 무릇 48진, 약 1만에 달하였음. 허위를 군사(軍師)로, 이강년을 호서장(湖西將)으로, 이태영(李泰榮)을 진동장(鎭東將)으로, 김준수(金俊洙)를 안무장(安撫將)으로, 연기우(延起羽)를 대대장(大隊長)으로 삼아 바야흐로 경성에 들어가려고 하여 약 30리 지점에 달하였음. 이 동안 전투가 38회에 달함.”
  
 
서울탈환 작전에 서병희는 허위의 결사대 선봉장으로 참여하였으나 일제의 선제공격으로 실패한 뒤, 허위로부터 영남으로 내려가 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1908년 1월 31일(음 12.28) 해산군인 5명을 거느리고 귀향하였다. 서병희와 같이 귀향한 인물들은 아마도 영남이 고향인 의병일 가능성이 크다. 서병희가 경상북도 경주에 도착한 시기는 1908년 3월경이었다.
 
서울탈환 작전에 서병희는 허위의 결사대 선봉장으로 참여하였으나 일제의 선제공격으로 실패한 뒤, 허위로부터 영남으로 내려가 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1908년 1월 31일(음 12.28) 해산군인 5명을 거느리고 귀향하였다. 서병희와 같이 귀향한 인물들은 아마도 영남이 고향인 의병일 가능성이 크다. 서병희가 경상북도 경주에 도착한 시기는 1908년 3월경이었다.

2024년 7월 8일 (월) 08:15 기준 최신판

정의

1867(고종 4)∼1909(순종 2). 조선 말기의 의병장.달성 서씨

울산 의병 전쟁에 참여한 양산의 서병희 의병장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였던 양산 상북면 대석리 출신 의병 서병희가 울산 경주 접경지역에서 윤정의(尹政儀) 의병부대에 1908년 3월경 합류하였다.

서병희(徐丙熙, 徐炳熙, 1867~1909)는 1867년 양산군 중북면 좌삼리(현 양산시 상북면 좌삼리 97번지)에서 달성 서병권(徐柄權)과 청주 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영호(榮浩), 자는 경운(敬運)이다. 서병희는 키가 크고 마른 편으로 다소 학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경남 양산(梁山)에서 한의업을 경영하고 있었다.

서병희는 “융희 원년(1907) 8월 광무황제[韓皇]의 양위가 되고 계속하여 일한협약(日韓協約, 정미7조약)이 체결이 되어 내치외교(內治外交) 모두 일본의 간섭을 받고 그 보호 하에 서게 된 것은 오로지 송병준(宋秉畯)이가 일진회(一進會)를 인솔하여 때에 이토 히로부미 통감[伊藤統監]과 모의 결행한 것이라” 보았다. 이것은 “5백 년 이래 독립인 한국의 사직(社稷, 나라)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깊이 생각[思料]”하였다. 이러한 국란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우국(憂國)의 지사(志士)와 결사(結事)를 거사(擧事)하고자 애태우던[焦慮] 중 우연히 허위(許諱)라는 사람이 [거병의] 음모(陰謀)가 있음을 알고 동년 음(陰) 10월 허위의 부하(部下)에 들어가서 허위로부터 서병희의 재주가 있음를 알고 대접[知遇]을 얻어서 동년 음(陰) 11월까지는 오로지 음모단(陰謀團, 의병) 동지[同士]의 결합에 분주하였다.”

서병희는 1907년 음력 10월 허위의 부대에 들어가서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음력 11월에 의병 동지들을 결합하였다. 허위 의병부대는 경기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하며 항일 의병 전쟁을 수행하였다. 12월에 이르러서는 그 세력이 수천 명에 달했다. 허위는 “종전의 춘추대의에 의해 봉기하였던 의병투쟁을 자주적 민족 보존과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 의병 투쟁으로 전개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16개 의병부대[의진義陣]가 합세하여 8000명의 연합부대가 형성되었다. 11월 경기도 양주로 옮겼을 때 의병장 허위, 이강년을 비롯한 48개 의병부대 약 1만 명 규모로 증가하였다. 이 중에 해산군인이 3000명이었다.

연합의병부대가 결성된 뒤 통합군 사령부[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陳所)]를 설치하여 서울 진공을 하기로 합의하고,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허위를 군사장으로 추대하였다. 연합의병부대는 본격적인 서울진공작전을 개시하였다. 1월 초 군사장 허위는 300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에 도착하였다.

일제는 ‘이인영진술조서’에서 서울진공작전의 개요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907년 8월 그는 3진(陣)의 장(將)으로 8도에 격문을 보내 병사를 소집하고 정부 백관의 죄악을 헤아려 통감 및 각국 총영사에게 글을 보내 일본이 전약(前約: 시모노세키조약-필자 주)을 어기는 행위가 있음을 호소하였음. 그러는 사이에 지평(砥平)에 이르자 16진의 병사를 합하여 8천여 명에 달하였는데, 군사를 머물게 하고 2개월간 통감의 회답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음. 이 동안 3차례의 접전하였음. 11월에 이르러 홍천, 춘천을 거쳐 양주에 이르자 이때 허위, 이강년이 와서 합하여 무릇 48진, 약 1만에 달하였음. 허위를 군사(軍師)로, 이강년을 호서장(湖西將)으로, 이태영(李泰榮)을 진동장(鎭東將)으로, 김준수(金俊洙)를 안무장(安撫將)으로, 연기우(延起羽)를 대대장(大隊長)으로 삼아 바야흐로 경성에 들어가려고 하여 약 30리 지점에 달하였음. 이 동안 전투가 38회에 달함.”

서울탈환 작전에 서병희는 허위의 결사대 선봉장으로 참여하였으나 일제의 선제공격으로 실패한 뒤, 허위로부터 영남으로 내려가 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1908년 1월 31일(음 12.28) 해산군인 5명을 거느리고 귀향하였다. 서병희와 같이 귀향한 인물들은 아마도 영남이 고향인 의병일 가능성이 크다. 서병희가 경상북도 경주에 도착한 시기는 1908년 3월경이었다.

서병희는 경주 산내면에서 윤정의(尹政儀)가 창의하여 의병 투쟁 중임을 듣고 이들과 같이 경주와 인근 언양・울산군에서 의병전쟁을 벌였다. 서병희가 만난 윤정의는 당시 경주 산내면과 언양 북쪽 두북면(현 두동, 두서지역), 울산 문수산 등지에서 활동하였던 윤만파(尹萬波) 의병부대였다. 서병희가 서울에서 울산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의병들이 결집되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더, 손병희는 1908년 3월부터 5월까지 울산지역에서 윤만파 의병부대와 같이 활동하였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생애 및 활동사항

경상남도 양산 출신. 고향에서 한의업에 종사하다가 군대해산 직후인 1907년 12월임진강·한탄강 유역에서 활동 중이던 의병장 허위(許蔿) 휘하에 들어갔다.

1907년 12월 허위로부터 영남으로 내려가 의병을 일으키라는 명을 받고 해산군인 51명을 거느리고 남하, 윤정의(尹政儀)와 제휴해 항전을 벌이게 되었다. 1908년 4월 윤정의 의병부대와 합동으로 울산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고 이어 경주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1908년 6월 윤정의와 결별한 뒤 고향 양산 일대에서 독자적으로 활동, 하서면·하북면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뒤 1908년 9월 경상남도산청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활동 중이던 의병장 박동의(朴東儀) 휘하에 들어가 부장이 되었다. 이학로(李學魯)와 함께 산청두량곡(斗量谷)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 이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어 이학로 부대의 향도관(嚮導官)으로 있다가 1909년 3월 독립해 소모장 이성로(李聖老), 도포장 이춘실(李春實), 파수장 이국선(李局善), 연습장 김재익(金在益) 등의 독자적인 부대 편제를 갖춘 뒤로는 경상남도 전역을 전전하며 항전을 벌였다.

부대 편성 직후 합천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고, 이어 5월 함안군 군북시장에서 일본인을 응징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서에 각성을 촉구하는 격문을 보내기도 하였 다. 또한, 7월에는 부하 30여 명을 거느리고 칠원주재소를 습격해 순사 1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군자금 800냥을 거두었다.

9월에도 창원 양전의 부호 박진사로부터 군자금 30원을 거두었다. 10월에는 부하 18명을 거느리고 진주가좌면에서 재무주사를 처단하고, 12월 의령과 고성에서도 일본상인을 사살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1월함안군 부곡리의 민가에 무기와 의복을 은닉해 놓고 정탐하기 위해 상인으로 가장하고 김해로 들어왔으나, 밀고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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