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석(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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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석(徐京錫)목사.(경실련 설립자)

대한민국의 개신교 뉴라이트 목사 겸 시민운동가.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양증조할아버지: 서상륜(徐相崙 한국 최초 교회 소래교회 설립자)
  • 친증조할아버지: 서경조(徐景祚 한국 최초 목사)
    • 큰할아버지: 서동원(徐東元 1901-1950 목사)
    • 할아버지(서상륜의 양자): 서병호(徐丙浩 장로.독립운동가)
      • 아버지:서재현(徐載賢 장로. 독립운동가)
        • 형:서원석(장로.대한성서공회 본부장)
        • 본인:서경석(徐京錫 경실련 설립자)


한국교회 최초의 목사 가운데 하나인 서경조의 증손자이다. 서경조는 형 서상륜과 함께 1884년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인 소래교회를 창립하였다. 서상륜이 아들이 없어 서경조의 차남인 서병호서상륜의 아들로 입적되었다. 서경석서병호의 손자이자 서재현의 아들이다.

서울고등학교(18회)와 서울대학교 공대 기계과를 졸업한 후 기독교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은 적이 있으며 1975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1980년 석방되었다. 이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는 등 목회자 생활을 하다가 1982년 프린스턴신학교로 미국 유학을 떠난 후 1988년 귀국하였다.

미국 유학생활동안 목격한 NGO에 착안하여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을 창립하여 사무총장을 지내면서 한국에 시민운동의 개념을 뿌리내리게 하였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후원으로 조직의 재정을 충당하고, 단순한 구호를 넘어서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형태의 시민운동은 한국사회에서 대단히 신선한 모습이었고, 서경석 목사는 시민운동의 대부로서 높은 인지도를 가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정치권의 영입 0순위에 올랐으며, 지방자치제 시행을 앞두고 서울시장 후보로도 많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및 집권 민주자유당과 지나치게 밀착돼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1995년 사무총장직을 사퇴하고 경실련 산하 경제정의연구소장을 맡았다. 이듬해인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서울 양천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신한국당 박범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4년 박원순 변호사, 조희연 교수가 참여연대를 창립하면서 경실련과 참여연대가 시민운동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하게 되었고, 2000년 박원순 변호사가 주도한 낙천낙선운동에 반대하다가 시민운동 주류에서 밀려났다.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자, 기독교사회책임, 선진화시민행동 등 보수성향 단체들을 창립하고 스스로 대표를 맡아서 활동하면서 햇볕정책과 참여정부를 비판하는 행보를 보였다.

2011년 국내 개신교계 최대의 단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약칭 한기총)의 금권선거 논란이 불거지자, 자신이 지지했던 이광선 목사와 함께 나도 죄인이다라면서 참회의 고백을 해서 화제를 모았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특히 2000년 낙천낙선운동을 기점으로 그가 사실상 우익으로 전향해서 이때문에 상당수의 좌파 시민운동단체나 활동가들과도 불편한 관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는 경실련에서도 서경석 목사와 같이 언급되는 것을 대단히 꺼린다.당연하지 좌익계열 단체니까.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는 보수우익 성향의 인물들과 함께 하면서 "종북세력의 준동 때문에 나라가 혼란스럽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강경정책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계속 발표하면서 이런 인식이 확고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사찰 사건이 터졌을때 서경석 목사도 사찰대상이었다는게 드러났다.

서경석 목사 본인은 이런 비판에 대해서, 나는 보수가 아니며 북한 인권에 침묵하는 자들이 문제라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서경석 목사가 인터넷 기독교신문 크리스천투데이에 직접 기고한 좌파였던 서경석 목사가 왜 지금 보수가 되었나?을 보면 그의 입장을 잘 알수 있다. 글의 마지막은 "나는 보수가 아니다"로 끝난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비롯된 시민들의 촛불집회에 맞불집회를 주도하며 "이번에도 종북좌파들이 주도해 촛불시위를 만들었다. 언론이 난리치니까 국민들 멋도 모르고 춤추고 있다."고 여러 우파 시민단체에서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현재 서울 조선족 교회 담임을 맡고 있으며, 조선족과 북한이탈주민 인권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徐閈)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4대째 신앙 전통 이어온 믿음의 가문

서원석장로·서경석목사 가정

대를 이어 신앙의 전통이 이어지는 가정.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갖는 소망일 것이다. 스스로 혹은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인 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나도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하는 부러움을 가졌을 것이고, 게다가 신앙의 전통이 2대를 넘어 3대, 4대째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정에 대한 부러움은 이루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효양산 은선사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희성당(希聖堂)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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