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부이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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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부이별가

‘이신부이별가’는 다른 이별가와 구별하기 위하여 내용의 주인공인 이내수신부를 제목에 덧붙였다. 저작자는 이성수인데, 그의 형 이내수(아우구스티노, 1862~1900) 신부가 죽자 750구의 긴 장편가사로 이별의 아픔을 노래했다. 대부분의 천주가사가 교리에 입각하여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반하여, ‘이신부이별가’는 사제가 된 형의 일대기로서 그리움과 애통함 등 개인의 정서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개인의 감정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여느 천주가사와 같이 구원을 노래하며 신앙을 권고하는 부분도 있다.

음악적인 연구는 호남교회사 연구소장이었던 김진소 신부가 전라도 지방에서 채집한 것을 차인현 신부에게 제공했고, 최필선씨가 이를 채보하여 분석하였다. 이 천주가사는 호남지방 신자들 사이에서 애창되며 유명해졌는데, 이 노래를 통해 우정과 친목이 돈독해졌고 묵상용으로도 즐겨 불렀기 때문이다.(최필선, 1990)

내용의 주인공인 이내수신부는 전북 완주에서 태어났으며, 19살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다른 신학생 3명과 함께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거쳐 말레이반도 페낭에 있는 국제공동신학교로 갔다. 그는 페낭의 생활에 익숙해지기 전에 학교 측의 귀국조처로 되돌아왔고,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당시 페낭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조선 유학생이 21명이었는데, 낯선 기후 풍토에 적응하지 못해 7명이 병사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페낭에서는 한국 유학생들을 귀국시켰고, 이 신부도 이때 귀국하게 된 것이다.(김원철 기자, 평화신문 제1034호. 2009년 9월 6일)


▲ 악보 ‘이신부이별가’.

천주교의 신학교 교육은 성직자 양성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일반교과목을 배우는 소신학교(중등과정)와 철학 신학의 전문교육을 배우는 대신학교(대학과정)로 구별된다. 그러나 한국에 가톨릭이 들어온 초기(1784~1886)에는 이질적인 서양문명을 배척하기 위한 박해로 인해서 신학교육이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당시 신학교육은 해외에서 이루어졌으며, 종교자유기인 1886년 이후에는 국내에서도 이루어졌다. 해외교육은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선발된 소년들이 마카오(1836년)나 페낭(1854, 1858, 1882~1884)으로 유학을 간 것이며, 국내교육은 1837년 2~3년의 속성신학과정과 1855년 충북 제천의 신학교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지다가 1886년 가톨릭 신학교의 전신인 용산신학교에서 시작될 수 있었다.(노명신, 1978)

16년에 걸친 수련과 학업 끝에 1897년 사제가 된 이내수 신부는 한국교회의 여섯 번째 사제이며, 광주·전남지방에서 배출된 첫 한국인 사제이다. 그러나 그는 사제가 된 지 3년이 된 38살 젊은 나이에 두메산골 성당에서 폐결핵으로 병사하였다. “건강이 악화돼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는 전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가르칠 수도 없고, 항상 누워 지냅니다. 경본도 못 보고 미사도 못 지냅니다. 미사 때 영성체 후 성체를 세 번이나 토했습니다. 그 뒤로 감히 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1900년 10월 8일 뮈텔 주교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 김원철 기자, 평화신문 제1034호)

저작자 이성수에 대한 기록은 그의 세례명이 바오로(하성래, 1985)와 프란치스코(주호식, 굿뉴스자료실) 등 정확하지 않지만, 그의 형 이내수 신부의 약력은 1897년 12월 서품, 1898년 8월 목포에서 데예신부의 보좌로 임명, 1899년 7월 무안 우적동(현 몽탄면)에서 사목활동을 한 후 1900년 12월 20일에 사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생 이성수는 사제의 꿈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한 형에 대한 안타까움을 4·4조 750구로 길게 표현하였다. 「구산최씨본가첩」에 ‘리별가’로 수록되어있으며, 리별가 끝에 1948년에 베꼈다는 구절도 있다. 앞부분의 가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별이야 이별이야 우리형님 이별이야 / 정결하온 우리형님 십구세에 결정한 것

동정으로 수정할제 천주대전 허원이라 / 사랑하는 우리형님 구만먼리 타국으로

공부하러 가실적에 세속사정 끊으시고 / 영혼일만 하시려고 모친동생 이별할제

애련답답 슬픔이여 모든정이 어떠하며 / 형제의정 끊으시고 애련답답 슬픔이라

이별이야 이별이야 사랑하올 우리형님 / 모친동생 이별하고 구만먼리 타국가서

독실공부 하시면서 편지하네 편지하네 / 매년일차 편지하네 죽은사람 보난다시

즐거움도 충양없네 반가울손 우리형님…(후략)…

‘이신부이별가’는 12/8박자 22마디로 채보 되었으며 주요리듬은 ♪♪♪♩. 이다. ‘이신부이별가’의 채집지역은 전라도이지만, 전라도 민요의 특징인 극적이고 한스럽게 표현되지 않고 빠르고 힘찬 메나리토리로 표현되었다. 메나리토리란 경상도 지역과 강원도 지역의 민요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도-라-미(날좀보소)’와 같이 거뜬거뜬하고 경쾌하게 부르는 것이다. ‘이신부이별가’는 미 라 도의 3음으로 구성되었고, 선율유형은 A형인 라-도-라-미가 13회, B형인 미-라가 5회 나타난다. 변화형(A+, B+)은 음이 추가 혹은 생략되고 리듬이 약간 바뀌는 정도이다.

‘이신부이별가’는 사제가 된 이내수(아우구스티노) 신부의 일대기를 동생 이성수가 1901년에 지은 750구의 긴 장편가사이다. 호남지방 신자들 사이에서 우정과 친목을 도모하거나 묵상용으로 즐겨 애창되던 천주가사이다. 형에 대한 애절한 내용을 담았지만, 노래는 경쾌하고 힘 있게 부르는 메나리토리의 특징으로 되어있다. 이는 포교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천주가사의 특성상 전통음악의 한보다는, 메나리토리와 정악의 편안함과 경쾌함이 하느님 찬양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