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부이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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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부이별가

‘이신부이별가’는 다른 이별가와 구별하기 위하여 내용의 주인공인 이내수신부를 제목에 덧붙였다. 저작자는 이성수인데, 그의 형 이내수(아우구스티노, 1862~1900) 신부가 죽자 750구의 긴 장편가사로 이별의 아픔을 노래했다. 대부분의 천주가사가 교리에 입각하여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반하여, ‘이신부이별가’는 사제가 된 형의 일대기로서 그리움과 애통함 등 개인의 정서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개인의 감정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여느 천주가사와 같이 구원을 노래하며 신앙을 권고하는 부분도 있다.

음악적인 연구는 호남교회사 연구소장이었던 김진소 신부가 전라도 지방에서 채집한 것을 차인현 신부에게 제공했고, 최필선씨가 이를 채보하여 분석하였다. 이 천주가사는 호남지방 신자들 사이에서 애창되며 유명해졌는데, 이 노래를 통해 우정과 친목이 돈독해졌고 묵상용으로도 즐겨 불렀기 때문이다.(최필선, 1990)

내용의 주인공인 이내수신부는 전북 완주에서 태어났으며, 19살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다른 신학생 3명과 함께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거쳐 말레이반도 페낭에 있는 국제공동신학교로 갔다. 그는 페낭의 생활에 익숙해지기 전에 학교 측의 귀국조처로 되돌아왔고,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당시 페낭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조선 유학생이 21명이었는데, 낯선 기후 풍토에 적응하지 못해 7명이 병사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페낭에서는 한국 유학생들을 귀국시켰고, 이 신부도 이때 귀국하게 된 것이다.(김원철 기자, 평화신문 제1034호. 2009년 9월 6일)


▲ 악보 ‘이신부이별가’.

천주교의 신학교 교육은 성직자 양성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일반교과목을 배우는 소신학교(중등과정)와 철학 신학의 전문교육을 배우는 대신학교(대학과정)로 구별된다. 그러나 한국에 가톨릭이 들어온 초기(1784~1886)에는 이질적인 서양문명을 배척하기 위한 박해로 인해서 신학교육이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당시 신학교육은 해외에서 이루어졌으며, 종교자유기인 1886년 이후에는 국내에서도 이루어졌다. 해외교육은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선발된 소년들이 마카오(1836년)나 페낭(1854, 1858, 1882~1884)으로 유학을 간 것이며, 국내교육은 1837년 2~3년의 속성신학과정과 1855년 충북 제천의 신학교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지다가 1886년 가톨릭 신학교의 전신인 용산신학교에서 시작될 수 있었다.(노명신, 1978)

16년에 걸친 수련과 학업 끝에 1897년 사제가 된 이내수 신부는 한국교회의 여섯 번째 사제이며, 광주·전남지방에서 배출된 첫 한국인 사제이다. 그러나 그는 사제가 된 지 3년이 된 38살 젊은 나이에 두메산골 성당에서 폐결핵으로 병사하였다. “건강이 악화돼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는 전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가르칠 수도 없고, 항상 누워 지냅니다. 경본도 못 보고 미사도 못 지냅니다. 미사 때 영성체 후 성체를 세 번이나 토했습니다. 그 뒤로 감히 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1900년 10월 8일 뮈텔 주교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 김원철 기자, 평화신문 제1034호)

저작자 이성수에 대한 기록은 그의 세례명이 바오로(하성래, 1985)와 프란치스코(주호식, 굿뉴스자료실) 등 정확하지 않지만, 그의 형 이내수 신부의 약력은 1897년 12월 서품, 1898년 8월 목포에서 데예신부의 보좌로 임명, 1899년 7월 무안 우적동(현 몽탄면)에서 사목활동을 한 후 1900년 12월 20일에 사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생 이성수는 사제의 꿈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한 형에 대한 안타까움을 4·4조 750구로 길게 표현하였다. 「구산최씨본가첩」에 ‘리별가’로 수록되어있으며, 리별가 끝에 1948년에 베꼈다는 구절도 있다. 앞부분의 가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별이야 이별이야 우리형님 이별이야 / 정결하온 우리형님 십구세에 결정한 것

동정으로 수정할제 천주대전 허원이라 / 사랑하는 우리형님 구만먼리 타국으로

공부하러 가실적에 세속사정 끊으시고 / 영혼일만 하시려고 모친동생 이별할제

애련답답 슬픔이여 모든정이 어떠하며 / 형제의정 끊으시고 애련답답 슬픔이라

이별이야 이별이야 사랑하올 우리형님 / 모친동생 이별하고 구만먼리 타국가서

독실공부 하시면서 편지하네 편지하네 / 매년일차 편지하네 죽은사람 보난다시

즐거움도 충양없네 반가울손 우리형님…(후략)…

‘이신부이별가’는 12/8박자 22마디로 채보 되었으며 주요리듬은 ♪♪♪♩. 이다. ‘이신부이별가’의 채집지역은 전라도이지만, 전라도 민요의 특징인 극적이고 한스럽게 표현되지 않고 빠르고 힘찬 메나리토리로 표현되었다. 메나리토리란 경상도 지역과 강원도 지역의 민요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도-라-미(날좀보소)’와 같이 거뜬거뜬하고 경쾌하게 부르는 것이다. ‘이신부이별가’는 미 라 도의 3음으로 구성되었고, 선율유형은 A형인 라-도-라-미가 13회, B형인 미-라가 5회 나타난다. 변화형(A+, B+)은 음이 추가 혹은 생략되고 리듬이 약간 바뀌는 정도이다.

‘이신부이별가’는 사제가 된 이내수(아우구스티노) 신부의 일대기를 동생 이성수가 1901년에 지은 750구의 긴 장편가사이다. 호남지방 신자들 사이에서 우정과 친목을 도모하거나 묵상용으로 즐겨 애창되던 천주가사이다. 형에 대한 애절한 내용을 담았지만, 노래는 경쾌하고 힘 있게 부르는 메나리토리의 특징으로 되어있다. 이는 포교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천주가사의 특성상 전통음악의 한보다는, 메나리토리와 정악의 편안함과 경쾌함이 하느님 찬양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인 첫 호남 사제, 천주교 신부로 우리나라에서 여섯번째로 세례받은 호남의 첫 사제 이내수 신부(아우구스티노)님

이내수 신부(아우구스티노)의 묘: 전남 무안군 몽탄면 사천리 95

이내수 신부(아우구스티노)는 1862년 8월 10일 전라북도 완주의 독실한 천주교 교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19살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16년에 걸친 수련과 학업 끝에 1897년 사제가 된 이내수 신부는 한국 교회의 여섯 번째 사제이며, 광주 전남 지방에서 배출된 첫 한국인 사제이다.

그러나 그는 사제가 된 지 3년이 된 38살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병사하였다. 하지만 이내수 신부는 우적동 성당에서 1년 7개월 동안 병마와 싸우면서도 24명에게 세례를 주고 성사를 집전하였으며, 예비신자들을 위해 교리를 가르치고 교리서를 50여 명에게 주었다고 한다.

또한 이내수 신부는 홀로 눈물겨운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인간의 나약함를 초월하여 임종의 순간까지 쇠잔한 몸을 이끌며 성직을 수행했다고 한다.

환학동공소(喚鶴洞公所)

위치는 전남 무안군 일로읍 환학길 1 상신기리 594-1

광주대교구 일로본당 환학동공소(환학동성당)


환학동공소(환학동성당)의 역사는 전남 함평 보아촌 서용호(徐龍鎬)(베드로) 부부가 1880년 환학동으로 이주해 자택에서 주일 예절을 하면서 시작됐다. 1899년에는 이내수신부와 방상규(다마소) 부부가 환학동 전교를 시작했고, 이내수신부(이내수신부의 묘: 전남 무안군 몽탄면 사천리 95)가 임종하면서 방상규 부부는 환학동으로 이주해 정착하게 됐다. 1913년에 건물을 신축해 광주대교구 산정동본당 소속이 된 환학동공소는 1954년 일로본당 공소로 편입됐다. 현재 41세대 76명의 신자들이 활동 중이다.


서용호(徐龍鎬 이조참판(吏曹參判).종 2품.차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베드로)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본관은 이천 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파

이천 서씨 시조 1세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부총리)  30세 후손.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국무총리)

4세 서유걸(徐維傑 상서우복야.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

5세 서정(徐靖 중서시랑평장사.판삼사사(判三司事). 종 1품.국무총리)

6세 서균(徐鈞 판장작감사.검교상서우복야.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

7세 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 종5품.평장사 정2 품 부총리)

8세    실전

9세    실전

10세  실전

11세 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 병부상서 공파)

12세 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육군참모총장급)

13세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고려충신).정 3품. 장관급)

14세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

15세 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

16세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

17세 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

18세 서연(徐演 참봉(參奉).종 8품)-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파 강호문중(江湖公派))

19세 서간(徐諫 진사(進士). 판관(判官).부장판사)

20세 서경춘(徐景春 병조좌랑(兵曹佐郞) .차관보)

21세 서영조(徐榮祖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부장검사)

22세 서국장(徐國章 의병장(義兵將). 호조참의(戶曹參議). 정3품. 차관)

23세 서징용(徐徵龍 생원(生員)

24세 서명유(徐命裕 생원生員)

25세 서사준(徐士俊 생원生員)

26세 서복문(徐福門 생원生員)

27세 서시영(徐時永 생원生員)

28세 서영효(徐榮孝 호조참판(戶曹參判).종 2품 .차관)

29세 서온기(徐溫基)통정대부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정 3품. 청와대비서실차장)

30세 서용호(徐龍鎬 이조참판(吏曹參判).종 2품.차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베드로)

31세 서권수(徐權洙=서득중(徐得中)

상신기리(上新基里) 환학동(喚鶴洞) (목포 무안군 카톨릭 최초 신자-지방유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발라바)

서정수(徐正洙 한양대 인문대학장.카톨릭(천주교) 구약성서.신약성서 완성)

32세 서종식(徐鍾植 민선 일로읍장.카톨릭(천주교) 세례명;마두)

서준식(徐俊植 정치대(국민대학교전신). 우국지사.카톨릭(천주교)세례명:비오)

서연식(徐連植 현대음향사장.KMTV설립자)

33세 서강수(徐康壽 정통부(체신부) 국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바오로)

서정순(徐貞順)

34세 서재원(徐載源 코스닥 상장사 본부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아오스딩)

35세 서형정(徐亨姃 직장인.카톨릭(천주교)세례명:제노비아)

서정민(徐廷旼 대학생.카톨릭(천주교)세례명:알렉산더)


가족

  • 시조 : 서신일(徐神逸 정2품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
  • 시조모 : 합천 홍씨(陜川 洪氏) 홍찬(洪贊)의 딸
    • 서필(徐弼, 901~965, 종1품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三重大匡太師內史令) 국무총리)
      • 서희(徐熙 종1품 내의령內議令) 국무총리)
        • 서유걸(徐惟傑,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부총리)
          • 서정(徐靖)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부총리)
            • 서균(徐鈞 정2품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부총리)
              • 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정2품 평장사(平章事) 부총리)
                • 실 전
                  • 실 전
                    • 실 전
                      • 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종1품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장관.국무총리)
                        • 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
                          •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
                            •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
                              • 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
                                •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조선 충신). 정2품.장관)
                                  • 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
                                    • 서연(徐演 참봉(參奉).종 8품)-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파 강호문중(江湖公派))
                                      • 서간(徐諫 진사(進士). 판관(判官).부장판사)
                                        • 서경춘(徐景春 병조좌랑(兵曹佐郞) .차관보)
                                          • 서영조(徐榮祖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부장검사)
                                            • 서국장(徐國章 의병장(義兵將). 호조참의(戶曹參議). 정3품. 차관)
                                              • 서징용(徐徵龍 생원(生員)
                                                • 서명유(徐命裕 생원生員)
                                                  • 서사준(徐士俊 생원生員)
                                                    • 서복문(徐福門 생원生員)
                                                      • 서시영(徐時永 생원生員)
                                                        • 서영효(徐榮孝 호조참판(戶曹參判).종 2품 .차관)
                                                          • 서온기(徐溫基)통정대부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정 3품. 청와대비서실차장)
                                                            • 서용호(徐龍鎬 이조참판(吏曹參判).종 2품.차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베드로)
                                                              • 서권수(徐權洙=서득중(徐得中) 상신기리(上新基里) 환학동(喚鶴洞) (목포 무안군 카톨릭 최초 신자-지방유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발라바)
                                                              • 서정수(徐正洙 한양대 인문대학장.카톨릭(천주교) 구약성서.신약성서 완성)
                                                                • 서종식(徐鍾植 민선 일로읍장.카톨릭(천주교) 세례명;마두)
                                                                • 서준식(徐俊植 정치대(국민대학교전신). 우국지사.카톨릭(천주교)세례명:비오)
                                                                • 서연식(徐連植 현대음향사장.KMTV설립자)
                                                                  • 서강수(徐康壽 정통부(체신부) 국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바오로)
                                                                    • 서재원(徐載源 코스닥 상장사 본부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아오스딩)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2]]


이신부이별가

‘이신부이별가’는 다른 이별가와 구별하기 위하여 내용의 주인공인 이(내수)신부를 제목에 덧붙였다. 저작자는 이성수인데, 그의 형 이내수(아우구스티노, 1862~1900) 신부가 죽자 750구의 긴 장편가사로 이별의 아픔을 노래했다. 대부분의 천주가사가 교리에 입각하여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반하여, ‘이신부이별가’는 사제가 된 형의 일대기로서 그리움과 애통함 등 개인의 정서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개인의 감정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여느 천주가사와 같이 구원을 노래하며 신앙을 권고하는 부분도 있다.

몽탄마을축제

시월의 멋진 날에 몽탄마을축제 이내수신부 묘 사복사복 걷기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효양산 은선사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희성당(希聖堂)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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