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 장군.부인은 서응문(徐應文)의 딸 부여 서씨(扶餘徐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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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金時敏)

이칭/별칭 면오(勉吾),충무(忠武)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허용기

조선 전기 천안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지평(持平)을 지낸 아버지 김충갑(金忠甲)과 어머니 창평 이씨(昌平李氏) 사이에서 4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인은 서팽수(徐彭壽) 의 딸 부여 서씨(扶餘徐氏)이다. 슬하에 자식이 없이 순국하였는데, 사후 문중에서 큰형인 김시회(金時晦)의 넷째 아들 김치(金緻)를 양자로 입양시켰다. 조선 8대 문장가의 한 명으로 꼽히는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이 김치의 아들이다.

[활동 사항]

1. 임진왜란 이전

김시민(金時敏)[1554~1592]은 충청도 목천현 백전동(栢田洞)[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가전리 잣밭] 출신으로, 25세 되던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에 임명되었다. 훈련원에 부임한 후 무기가 녹슬고 군인들의 기강이 해이하여 유사시에 제대로 쓸 만한 병기와 군인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 후 훈련원의 행정실무를 지위하는 판관이 되었을 때 병조 판서에게 두 번이나 이에 대해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과감하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훈련원에서 물러나 고향인 잣밭으로 내려와 생활하던 중 1583년(선조 16)에 니탕개(尼蕩介)의 난이 발발하였다. 니탕개는 조선에 귀화한 여진인(女眞人)으로 변방 6진에 출입하면서 조정으로부터 관록과 후대를 받아온 인물이다.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우참찬 겸 황해도 도순찰사였던 정언신(鄭彦信)을 진압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정언신은 이순신·신립·이억기·김시민·원균 등 당시 쟁쟁한 무관들을 막하 장수로 거느리고 출정하여 적군을 두만강 너머까지 추격하여 근거지를 소탕하는 등 반란을 진압하였다.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김시민은 다시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종5품직 군기시 판관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 발발 전해인 1591년에는 진주 판관으로 부임하여 진주 목사를 보좌해 행정 실무를 담당하면서 군정 등에 참여하였다.

2. 임진왜란 시 활약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 신병을 핑계 삼아 지리산으로 피신했던 목사 이경(李璥)이 사망하자 김시민은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의해 진주 목사를 대행하게 되었다. 이후 진주성을 지키며 매 전투에서 승리를 이끈 김시민의 공이 인정되어 정식 진주 목사로 승진하였다. 1592년 9월에는 진해의 왜장 평소태(平小泰)를 사로잡아 몽진 중인 선조에게 압송한 전과로 비변사의 장계에 의하여 통정대부가 되었다. 10월에 왜군이 대대적으로 진주성을 공격해 오자 3,800여 명의 관민(官民)을 이끌고 적장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가 이끄는 3만의 군대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의병장 곽재우·최경회 등이 적군의 배후를 위협하며 승리를 도왔다.

1592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마지막 날 적의 대대적인 총공세를 막아낸 후 성안을 순회하다가 시체 속에 숨어있던 적군이 쏜 탄환을 왼쪽 이마에 맞았고, 며칠 뒤인 10월 18일에 사망하였다. 전사하기 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다.

[묘소]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충민사(忠愍祠)에 김시민의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1604년(선조 37) 6월 25일에 김시민을 선무공신 2등과 상락군에 봉하였으며, 10월 29일에는 영정을 그려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관작과 품계를 2등급 올려 영원히 사유의 은전을 받도록 하였고, 반당 6명·노비 9명·구사 4명·전지 80결·은자 7냥·내구마 1필을 하사하였다.

또한 1709년(숙종 35) 6월 16일에는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하고 영의정에 추증하는 한편, 1711년(숙종 37)에는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1735년(영조 11년) 2월 14일에는 박문수 어사의 진언에 따라 동래 부사 송상헌의 사당에서 김시민을 우선 함께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김시민의 추모 행사는 과거 진주·천안·괴산 등지에서 행해졌으나, 1868년(고종 5) 9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각지의 사당이 훼철된 후 잠시 중단되었다가 그 후 부분적으로 부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생지인 천안에는 과거 김시민을 비롯하여 아버지 김충갑, 숙부 김제갑(金悌甲) 등을 함께 모셨던 충열사(忠烈祠)가 훼철된 이후 지금까지 추모 사당 및 생가 복원이 되지 않아 김시민을 추모할 수 있는 곳이 전혀 없는 상태이다. 다만 2000년 7월 19일에 설립된 민간단체인 ‘충무공 김시민 장군 기념 사업회’가 매년 김시민의 출생일인 양력 9월 23일에 탄신 기념 행사를 개최하는 등 추모 행사의 명맥을 겨우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경삼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김시민 장군 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가 있다.


서팽수(徐彭壽).본관은 부여 서씨


직계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첫째(혹은 셋째 아들이라고도 함, 아직도 학계의 설이 분분함) 아들 부여융(扶餘隆)이다. 660년(의자왕 20)에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에 패한 뒤에 멸망되어 의자왕과 태자 등 2,000여명은 당나라에 압송되었다. 당나라 고종은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내리고, 아들 부여융에게 서씨의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부여서씨의 문호는 열렸으나, 그 후 세계는 알 수 없었는데 서융(부여융)의 원손으로 이천 서씨(利川徐氏) 아간공 (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의 5세 후손인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源君)에 봉해진 서존(徐存)을 1세조로 받들고 부여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서존의 11대손은 서수손(徐秀孫)이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대구달성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조할아버지: 서정(徐靖)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
    • 고고조할아버지: 서존(徐存) (정3품 병부상서 태원군)
      • 고조할아버지: 서청습(徐淸習 정2품 판전의시사)
        • 증조할아버지: 서효리(徐孝理 정2품 좌복야)
          • 할아버지:서찬(徐贊 종2품 정당문학)
            • 아버지: 서희팔(徐希八 종2품 정당문학)
              • 본인: 서춘(徐椿 정2품 판내부사사)
              • 동생: 서능(서릉)(徐稜 종1품 문하시중)
              • 동생: 서박(徐樸 봉례공)
              • 동생: 서적(徐迪남양군)
              • 동생: 서직(徐稷 연성군)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면(徐冕 정4품 주부)
      • 작은고조할아버지: 서린(徐嶙) (정2품 판대부사)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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