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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청동에 남은 외성당의 기억
이야기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동에는 조선 후기 문인 박광후(朴光後)가 거처하던 고택 외성당(畏省堂)이 있었다. 외성당은 조선 후기 현재의 광산구 안청동에 자리했던 고택으로, 지금은 철거되어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광주읍지(光州邑誌)』에는 이곳이 주읍의 북쪽 30리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어, 외성당의 입지와 존재가 문헌을 통해 전해진다.
박광후는 자를 사술(士述), 호를 안촌(安村) 또는 외성당(畏省堂)이라 하며, 조선 현종 연간에 성균관에 들어가 송시열로부터 “은산과 철벽이 될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은 문인이었다. 그는 1678년 자택인 외성당에서 42세로 생을 마쳤고, 이후 이 집은 아들 박중회(朴重繪)가 물려받아 거주하였다. 외성당은 이처럼 한 문인의 삶이 머물렀던 생활 공간이자 학문적 정체성이 응축된 장소였다.
외성당은 1930년대 철거된 뒤 지금은 건물이 남아 있지 않지만, 현재 그 터에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다. 다만 마당에 있었던 은행나무가 남아 있어, 한때 이곳에 고택이 있었음을 전하는 흔적으로 여겨진다. 이 집과 관련된 기록으로는 한말 의병장 기우만(奇宇萬,1846~1916)이 남긴 「외성당기(畏省堂記)」와, 박광후의 후손 박만동(朴萬東)의 요청에 따라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이 집필한 또 다른「외성당기(畏省堂記)」가 전한다. 특히 최익현은 당호 ‘외성(畏省)’이 지닌 ‘두려워하며 스스로를 살핀다’는 뜻을 빌려, 서양 문물의 유입으로 전통 질서가 흔들리던 당대 사회를 비판하였다.
외성당은 사라졌지만, 문헌 기록과 나무 한 그루, 그리고 당호에 담긴 의미를 통해 안청동에 남은 기억으로 전해지고 있다.
스토리 그래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