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법용스님(法涌, 1936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9월 17일 (화) 21:32 판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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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법용(法涌)스님은 인홍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오랫동안 석남사에 주석하였고 단일계단구족계 비구니 존증아사리를 역임한 대한민국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6 경북 상주 출생
1956 문경 김룡사에서 인홍(仁弘)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7 통도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1 통도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69~1972 석남사 심검당 선방에서 3년 결사
1972~1975 석남사 총무・교무・재무
1981~1984 대한불교조계종 제7대 중앙종회의원
1984~1988 석남사 주지
1990~1997 석남사 정수선원 입승
1994~1998 대한불교 조계종 제11대 중앙종회의원
석남사, 해인사 삼선암, 양산 내원사, 범어사, 대성암 등에서 정진
2002~2004 단일계단구족계 비구니 존증아사리
2004 석남사 주석(선덕)
2018.1.8. 석남사에서 세납 82세, 법랍 60세로 입적
문중 법기문중(法起)
생활신조 오로지 참선 수행
상훈 종무행정 모범사찰 총무원장 표창패(1986) 외 다수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현공(玄空)・대성(大成)・현찬(玄贊)・일초(一超)・일실(一實)・구상(九相)・일현(一玄) ・정일(淨一)・일돈(一頓)・일소(一笑)・석마(石馬)・공아(空阿)・천우(千雨)・천륜(千輪)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부영(扶榮, 6)→심공(心空, 7)→정자(淨慈, 8)→인홍(仁弘, 9)법용(法涌, 10)→현공(玄空, 11), 대성(大成, 11), 현찬(玄贊, 11), 일초(一超, 11), 일실(一實, 11), 구상(九相, 11), 일현(一玄, 11), 정일(淨一, 11), 일돈(一頓, 11), 일소(一笑, 11), 석마(石馬, 11), 공아(空阿, 11), 천우(千雨, 11), 천륜(千輪, 11), 중실(中實, 11), 중수(中守, 11), 지산(智山, 11), 진원(眞源, 11)

활동 및 공헌

출생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428
[왼쪽부터 천묵, 혜근, 성우, 청룡, 법용스님]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425
[운문사 문수선원 혜은스님과 함께]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427
[백졸스님과 함께]
사진출처:불광미디어 https://www.bulkw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005
[법용스님 49재 회향하는 날]
사진출처:다음카페 https://m.cafe.daum.net/motansangsam/k8Hr/427?listURI=%2Fmotansangsam%2Fk8Hr

법용(法涌)스님은 1936년 10월 2일 경북 상주군 구양리 2구 250번지에서 아버지 장승봉과 어머니 김남이 사이의 4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단산이며, 이름은 장수재이다. 스님의 부모님은 남쪽 창문으로 햇빛이 방안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태몽을 꾼 뒤 스님을 낳았다고 한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스님은 10세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를 하면서 철저한 기독교 신자로 생활하였다.

출가

스님이 21세 되던 해인 1956년 신학교에 진학하려는 생각을 하면서도 삶에 대한 의문이 물리지 않아 심한 갈등으로 고민하던 차에 만공 스님의 제자로 참선 공부를 한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에게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는 말을 듣고 선생님의 권유로 출가의 큰 발심을 하게 되었다.

스님은 21세 때 친구와 함께 출가를 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친구는 출가했지만 스님은 부모님의 반대가 심해 6개월이 지나도록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스님은 목숨을 건 단식투쟁으로 간신히 허락을 받고 추운 겨울에 대 자유인이 되는 첫 발을 내딛었다.

스님은 1956년 문경 김룡사에서 인홍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하였다. 당시는 6·25 전쟁 직후라서 너나없이 어렵던 시절이었다. 절집의 살림은 더욱 팍팍하였고 행자 노릇은 참담할 정도였다. 사구(자배기)에다 살갗이 벗어지도록 보리쌀을 치댄 다음 어른 키만한 높이의 부뚜막 위를 오르내리며 공양을 지어야 했고 추위에 빨갛게 얼어 터져 피가 흐르는 손으로 청솔개비를 꺾으며 불을 때곤 했다. 그러자니 온몸에 그을음이 내려앉아 두 눈만 반짝거리는 생쥐 꼴이 되어도 비누를 아끼느라고 빨래도 자주 못해 입었다. 신심으로 충만한 스님에게는 꽁보리밥도 먹을 만했고, 군둥내 나는 김치우거지로 만든 찌개도 입에 달기만 했다.

스님은 1957년 8월 인홍스님을 은사스님으로, 자운 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1960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 큰스님을 계사로 보살계를 수지하고, 1961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 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은 어떤 스님이 입다 버린 다 떨어진 누비옷을 거두어 깨끗이 빨아 기웠다. 병풍 삼아 그 옷을 입고 나선 스님을 노보살 한 사람이 불러 세웠다. 그리고 ‘그 옷이 얼마나 비싼 것인지 알고나 입느냐?’고 물었다. 이에 스님은 누가 입다가 버린 하찮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노보살은 ‘한분의 수행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귀하고 비싼 것’이라고 깨우쳐주었다. 스님은 그 말씀을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수행과 석남사 소임

은사 인홍스님은 스님이 강당을 졸업한 뒤에도 공부를 계속해서 강사가 되어 젊은 출가자에게 초심을 지도하는 스승이 되어 주길 바라셨다. 그러나 그 길이 내키지 않아 동학사로 들어가서 사미과의 치문만 배우고 돌아와 버렸다. 그리고는 내내 내원사, 범어사, 해인사, 대승사의 윤필암 등의 선방에서 수행정진 하였다. 스님은 1969년부터 1972년에 이르는 동안 석남사 심검당 선방에서 3년 결사를 끝마친 뒤, 1972년부터 3년간 석남사 총무소임과 교무, 재무 소임을 두루 역임하였다.

스님은 동학사 강원에서 치문을 보고 나온 뒤에는 통도사 암자에 거주하면서 통도사에서 운허스님께 화엄경을 공부하였다. 또한 묘엄스님께 사집을 공부하고 석남사에 와서 묵묵히 소임을 살면서 오로지 은사스님을 모시고 대중 소임을 사는 한편 참선에 전념하며 수행 정진하였고, 종종 업장 기도로써 수시로 삼천 배를 올렸다. 법용스님은 1984년부터 4년 동안 석남사 주지를 역임하면서 은사스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석남사를 벗어나지 않았다.

제11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

1994년부터 1998년 제11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하기도 한 스님은 해인사 삼선암, 내원사, 대성암을 두루 다니면서 운수납자[1] 생활을 하였다.

후학들에 대한 당부

“제가 수십 성상 지키고 있어도 견성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수행 없이 어떻게 견성, 성불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어디 한 생 닦아서 부처님 되셨겠습니까. 금생에 못 이루면 다음 생, 아니면 세세생생토록 그저 닦고 또 닦아 나갈 따름입니다.”

스님은 수행의 방법으로 강원을 졸업한 뒤에 혼자 토굴 생활을 하려는 최근의 경향을 크게 우려하였다. “나도 처음 출가한 새 중 때에는 어디 가서 삼 년만 문 걸어 잠가놓고 주야로 정진하면 견성할 자신이 있었어요. 어린 마음이었지마는, 그런데 누가 햇 중을 공부만 하라고 앉혀놓습니까. 이런 일 저런 소임 맡기니까 꾸준히 공부를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지나고 보니 그 대중 속에 참 수행의 길이 있었습니다.”

스님의 이런 생각에는 대중 속에서만 제 허물을 옳게 찾을 수 있다는 소신이 있다. 행동거지가 옳으면 옳은 대로 그를 보고 따르게 되니 그러하고, 그르면 그른 대로 자신은 그와는 달라야 함을 되새기게 되니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혼자 살게 되면 제 맘 내키는 대로 살게 되니 그른 성품이 고쳐질 수가 없다. 수행은 다른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견제해 나가는 과정이니 토굴 행은 대중 속에서 수십 년을 산 뒤라야 비로소 자격이 있는 일이라는 게 스님의 생각이다.

주지가 맘에 맞지 않는다고 또는 은밀히 따로 노후 대책 삼아 독살림 차리려는 일을 영 못마땅해 한다. 누가 뭐라든지 세속을 떠날 때의 초발심을 그대로 지키어, 어떤 고통이라도 받아들인다는 각오로 선방을 지키고 앉아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대중 속에서 몸을 썩인다는 마음을 내어 줄 것을 간곡히 당부하는 것이었다.

“입산하여 중이라고 불리기에도 부족한 법랍의 사람들이 수행보다는 포교에 큰 관심을 두는 것도 문제입니다. 다른 종교와의 어쭙잖은 비교로 성급한 마음을 내는 일에는 깊은 생각이 뒤따라야 할 줄 압니다. 양로원이나 어린이 집을 지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일만이 능사는 아니지요. 그런 일은 종교의 역할 가운데 부분일 뿐이지 전체가 되거나 본 분사가 되지는 못합니다. 각자 자신의 심성의 바탕을 닦는 일이 더욱 중요합니다. 노후 문제만 해도 그래요. 일생을 대중 속에서 잘 살다보면 걱정할 게 없습니다. 제 생활만 철저히 하다보면 시봉도 생기기 마련이고요. 잘 살아 온 사람을 노인이 되었다고 홀대할 대중이 어디 있겠습니까?”

스님의 후학 재접 방식은 꼬장꼬장 하셔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 일로 인해 인심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이 가르침을 베풀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이상 올바르게 인도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스님의 깊은 속마음은 누구보다 따스하다. 본사에서 소임을 보지 않고 제방 선원을 다니거나 포교 일을 하느라고 바쁜 상좌들이 찾아오든 아니든 법용 스님은 늘 열여섯 벌의 옷을 준비해 두었다. 눈썰미가 좋고 손끝이 야물어 눈이 좋을 때는 시장에 나가 옷감을 끊어 와 손수 짓기도 하였다. 오지도 않는 제자들 옷가지까지 챙겨 둘 건 뭐냐고 짓궂게 놀려도 ‘그건 그 아이 사정이고 나는 할 일을 할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또한 아침마다 산내 상좌 모두를 불러 모아 차를 함께 마시는데, 갓 출가한 ‘새스님'도 끼어 있다. 스님은 특히 그 새 스님의 얼어서 곱은 손을 눈여겨보시며 한 말씀 들려주시곤 하였다. “티끌세상 벗어남은 보통 일이 아니니, 고삐 끝을 붙잡고 한바탕 일을 치르라. 매서운 추위가 뼛속 깊이 사무치지 않으면 어떻게 매화 향기 코를 찌르랴.”

입적

법용스님은 2018년 1월8일 석남사에서 입적했다.

수계제자로는 현공(玄空)・대성(大成)・현찬(玄贊)・일초(一超)・일실(一實)・구상(九相)・일현(一玄)・정일(淨一)・일돈(一頓)・일소(一笑)・석마(石馬)・공아(空阿)・천우(千雨)・천륜(千輪) 등이 있다.

석남사

[석남사]
사진출처: 네이버블로그 https://blog.naver.com/kimyc3189/222772283972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이 절은 824년(헌덕왕 16) 우리 나라에 최초로 선(禪)을 도입한 도의(道義)가 호국기도도량으로 창건한 선찰(禪刹)이다. 창건 당시 화관보탑(華觀寶塔)의 빼어남과 각로자탑(覺路慈塔)의 아름다움이 영남 제일이라고 하여 석남사(碩南寺)라 하였다고 하며, 일설에는 가지산의 별명이 석안산(碩眼山)이기 때문에 석안사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뒤 1674년(현종 15)에 언양현감 강옹(姜甕)의 시주로 탁령(卓靈)·자운(慈雲)·의철(義哲)·태주(泰珠)가 중창하였고, 진혜(振慧)·쌍원(雙遠)·익의(益儀)·성진(性眞)이 단청을 하였으며, 동시에 종과 북 등의 불구(佛具)를 마련하였다. 이어 정우(淨佑)·각일(覺日)·석맹(碩孟) 등이 극락전·청풍당·청운당·청화당·향각(香閣)을 증축하였고, 희철(熙哲)이 명부전을 세웠다.

1803년(순조 3)에는 침허(枕虛)와 수일(守一)이 중수하였고, 1912년에는 우운(友雲)이 중수하였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에 크게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57년 비구니 인홍(仁弘)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크게 증축하였다. 이 때부터 비구니 수도처로서 각광을 받은 이 절에는 항상 100명이 넘는 비구니 스님들이 엄격한 계율을 준수하면서 수도에 정진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여 극락전·설선당(說禪堂)·조사전(祖師殿)·심검당(尋劍堂)·침계루(枕溪樓)·정애루(正愛樓)·종루(鐘樓)·무진료(無盡寮)·대방(大房) 등 30여 동이 있다. 이들 가운데 극락전은 1791년(정조 15)에 세운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문화재로는 도의국사의 사리탑으로 전해지는 보물 제369호의 석남사 팔각원당형부도(石南寺八角圓堂形浮屠)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호인 삼층석탑, 조선 초기에 제작된 엄나무구유와 돌구유 등이 있다.

삼층석탑은 824년에 도의가 호국의 염원 아래 15층으로 세운 것이라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방치되어 오다가 1973년 스리랑카의 승려가 사리 1과를 봉안하면서 3층으로 개축한 것이다. 이 밖에도 절 입구에 4기의 부도가 있다.

석남사 관련 정보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법용(法涌)스님 본항목 볍용스님(法涌, 1936~) 法涌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용스님(法涌,_1936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법용스님(法涌) 법기문중(法起) ~의 일원이다
법용스님(法涌) 인홍스님(仁弘) ~의 수계제자이다
법용스님(法涌) 문경 김룡사 ~에서 출가하다
법용스님(法涌) 자운스님(慈雲)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비구니계
법용스님(法涌) 울산울주 석남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법용스님(法涌) 안거 ~을(를) 성만하다 울주 석남사, 합천 해인사 삼선암, 양산 내원사, 부산 범어사 대성암(청룡동) 등

지도

  • 석남사 :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064



다른 비구니 스님

지식관계망




주석

  1. 돌아다니는 승려를 무상한 구름과 물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