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朴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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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미상 ~ 1402(태종 2) = (65세 전후).] 여말선초 고려 우왕(禑王) 때부터 조선태종(太宗) 때까지 활동한 무인. 행직(行職)은 상호군(上護軍)이고, 증직(贈職)승추부(承樞府)판사(判事)이다. 본관은 음성(陰城)인데, 동북면(東北面) 출신이다. 고려 말에 공부상서(工部尙書)와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지낸 박재(朴榟)의 증손자이고, 문하시랑(門下侍郞)박문길(朴文吉)의 아들이다. 태조(太祖)이성계(李成桂)와 어릴 때의 친구이다.

고려말 우왕 · 창왕 · 공양왕 시대의 활동

1388년(우왕 14) 5월 우왕과 최영(崔瑩)이 요동(遼東) 정벌군을 일으켜서 명(明)나라를 칠 때 이성계(李成桂)가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에 임명되어, 좌군 도통사조민수(曺敏修)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요동(遼東)으로 진군하였고, 박순(朴淳)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지인(知印)으로 종군(從軍)하였다. 이미 이성계 일파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는 등 군사를 일으킬 수 없는 네 가지 이유, 이른바 ‘4대 불가론(不可論)’을 주장하고 요동 정벌에 극력 반대하였으나, 최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요동 정벌군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다가 강물이 크게 불어나자, 그 가운데 있는 위화도(威化島)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런데 군사들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장차 변란이 생기게 되었으므로, 이성계는 평소 중히 여겨서 가까이 두었던 박순을 불러서 급히 평양으로 보냈다. 그는 평양에 와서 정벌군을 독려하던 우왕과 최영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역리(逆理)와 순리(順理)로써 개진하여, 속히 회군(回軍)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우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좌군 도통사조민수를 설득하여 군사를 돌이켰다. 평양과 개성으로 쳐들어 간 이성계는 팔도 도통사최영(崔瑩)을 잡아 유배 보내고, 우왕을 내쫓은 다음 그 아들 창왕(昌王)을 즉위시켜 조선왕조 창건의 기반을 닦았다.

박순의 장인 임헌(任獻)은 고려 우왕 때 대사헌이었는데, 1388년 정월 <임견미(林堅味)의 반역 사건>에 연루되어 아들 3형제와 함께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이것은 고려 시중임견미가 평소 최영이 병권을 잡고 횡포를 부리는 것을 비판하다가, 도리어 최영 일파에게 죽음을 당한 사건이다. 그런데 위화도 회군 당시, 임헌의 사위인 박순이 앞장서서 최영의 군영을 공격하여 큰 공을 세웠던 것이다.(『장흥임씨(長興任氏) 족보』 참조) 이듬해인 1389년 이성계 일파가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였다. 그러나 박순의 활동이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 것 을 보면, 당시 그는 이성계의 측근으로 활동하지 않은 것 같다.

조선초 태조 · 정종 · 태종 시대의 활동

1392년 조선이 개국된 후, 박순이 여러 벼슬을 지냈을 것이 분명하지만, 『태조실록(太祖實錄)』에는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1392년(태조 7) 8월 태조이성계가 후실 강씨(康氏) 소생의 막내아들, 제 8왕자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삼자, 전실 한씨(韓氏) 소생의 여섯 아들이 모두 불평하였는데, 1396년(태조 5) 8월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가 죽고, 1398년(태조 7) 8월 이성계가 몸이 아파 위독한 틈을 타 제 5왕자 이방원(李芳遠)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어린 세자 형제를 잡아 죽이고, 세자를 보호하던 정도전(鄭道傳)과 남은(南誾) 일파를 타도한 후,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듬해인 1399년(정종 1) 태조의 양위를 받아, 제 2왕자 정종이 즉위하자, 박순은 수령관(首領官)이 되었다. 그해 6월 수령관박순이 내지(內旨: 임금의 명령)를 거짓으로 전달하였다고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당시 <왕자의 난> 이후에 궁중의 치안이 불안하여, 궁중의 숙위를 맡은 상장군(上將軍)과 대장군(大將軍)이 체직(遞直)할 경우에 숙위를 끝마친 아침 10시 경에 사은숙배(謝恩肅拜)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400년(정종 2) 박순은 장군(將軍)이 되었다가 대장군이 되었다. 그해 2월 정종이 이방원을 세자(世子)로 삼자, 제 4왕자 이방간(李芳幹)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패배하여 붙잡혀서 귀양 갔다. 이방간은 처음에 황해도 토산(兎山)으로 귀양 갔다가, 경기도 안산(安山)으로 옮겼는데, 그해 9월 정종이 장군 박순에게 명하여 그 부자를 전라도 익주(益州: 익산)로 옮겨서 안치하게 하였다.

1400년 11월 태종이방원이 즉위하고, 1401년(태종 1) 1월 사헌부 중승(中丞)이 되었다가, 그해 6월 상장군이 되었다. 그해 7월 승추부 경력(經歷)이 되어, 태종의 명령을 받고 총제(摠制)신극례(辛克禮)와 함께 본궁(本宮)과 무일전(無逸殿)을 헐고 고쳐서 지었다. 다시 상장군이 되었는데, 정승 이무(李茂)의 집에 분경(奔競)하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서 파직되었다. 태종이 곧 박순을 불러서 그대로 궁궐의 조성(造成)을 감독하게 하였다. 1402년(태종 2) 4월 상호군(上護軍)이 되어 부병(府兵)들을 마암(馬巖)에 모아서 기사(騎射)와 보사(步射)를 시험 보여서 갑사(甲士)를 뽑았다. 그해 9월 태종이 황해도 해주(海州)에 가서 강무(講武)했었는데, 이때 상호군이던 박순(朴淳)은 “해주는 지금 개간한 곳이 많아서 가서 사냥할 수 없습니다.”라고 만류하였다. 이에 태종은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강무하는 것뿐이다.”라고 답하였다.

그해 11월 안변부사(安邊府使)조사의(趙思義) 등이 태조이성계의 명령을 받들고 군사를 일으켜, 주군(州郡)의 수령들에게 전령을 보내어 군사를 차출하여 훈련하게 하였다. 조사의는 동북면 출신 신덕왕후 강씨의 친족인데, 억울하게 죽은 강씨의 소생 이방석 형제의 원수를 갚으려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조사의의 반란> 때 동북면의 여러 고을에서 모두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배후에는 토착여진의 이지란(李之蘭)과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 오도리족의 대추장 퉁멍거 티무르(童猛哥帖木兒) 등이 있었다.(「이지란 신도비(李之蘭神道碑)」 참조) 이들이 바로 이성계의 세력 기반인데, <조사의의 반란>은 중앙의 태종이방원과 동북면의 태조이성계의 대결이었던 셈이다. 태종은 상호군박순을 동북면으로 보내 이들을 초유(招諭)하도록 하였다. 박순은 함흥에 도착하여, 동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박만(朴蔓)과 여러 주군(州郡) 수령들에게 ‘조사의의 명령에 따르지 말라’고 교유(敎諭)하다가, 1402년 11월 8일 동북면 군중(軍中)에서 피살당하였는데, 호군(護軍)송류(宋琉)도 뒤따라 죽음을 당하였다. 박순은 태조이성계의 어릴 때 친구라고 하므로, 그가 죽을 때의 나이가 65세 전후라고 추정된다.

함흥차사와 조사의 반란

태조이성계는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나이 어린 세자 형제와 사위를 죽이고 임금이 된 이방원을 미워하여, 기회가 있으면, 고향 함주(咸主: 咸興)로 돌아가서, 군사를 일으키려고 생각하였다. 이성계는 <제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남은 등이 죽었으므로 중앙에는 이미 자신의 세력이 없지만 동북면에는 자기와 형제처럼 가까운 토호들과 여진족 추장들이 있으므로, 그들의 협력을 얻으면 중앙 정부를 전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정종과 세자 이방원은 아버지를 태상왕(太上王)으로 높이고 문안을 드리며 연회를 열어서 아버지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려고 애쓰는 한편, 그 측근을 제거하여 이성계의 힘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1399년(정종 1) 10월 15일 태상왕 이성계는 밤 4경(更) 신도(新都)에 행차한다고 핑계대고 도성을 빠져나와 고향 함흥(咸興)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세자 이방원이 뒤쫓아서 벽제역(碧蹄驛)까지 황급히 갔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섰다. 이때 대장군(大將軍)박순은 이방원을 만류하면서 끝까지 따라가도록 권유하기를, “태상왕이 비록 저하(邸下)로 하여금 따라오지 못하게 하였으나, 여기까지 왔다가 돌아가는 것은 신자(臣子)의 도리가 아닙니다. 만일 저하가 끝까지 따라가면 태상왕도 반드시 가지 못하고 중지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세자 이방원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돌아가 버렸다. 그때 태상왕 이성계는 후실 강씨의 무덤인 정릉(貞陵)을 찾아가서 마음대로 함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또 그 소생인 막내딸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될 때는 눈물을 흘렸는데, 막내 사위 이제(李濟)가 왕자의 난에 세자 이방석 형제와 같이 죽음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태상왕 이성계는 명산의 대찰(大刹)을 찾아다니면서 아들과 사위의 명복을 빌었다. 1400년 11월 13일 태종이방원이 즉위한 다음해 1401년(태종 1) 윤3월 11일 태상왕은 금강산을 유람하다가 마침내 고향 함흥으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태종은 내관(內官)을 사자(使者)로 보내어 태상왕에게 문안을 드리고 서울로 돌아오기를 간청하였는데, 그때마다 이성계는 사람을 시켜서 사자를 모두 죽여 버렸다. 이 연유로 한번 가면 돌아오자 않는 사람을 ‘함흥차사(咸興差使)’라고 부르게 되었다.

1401년 4월 10일 도승지(都承旨)박석명(朴錫命)을 안변부에 보내어 함흥에 있는 태상왕에게 문안을 드리고, 서울로 돌아오기를 간청하였으나. 오히려 태조이성계는 함흥에 오래 머무를 뜻을 내비쳤다. 이때 도승지박석명은 북청(北靑)에 있던 이지란도 함께 찾아가서 조정으로 불렀는데, 이지란은 일부러 승려를 불러서 불경을 읽는 척 하다가, 도승지가 태종의 글을 선포하고 물러가자, 즉시 입었던 관대(冠帶)를 불태워버리고, 칼로 자신의 머리털을 잘라버렸다고 한다.(『청해이씨(靑海李氏) 족보』 참조) 이 일화에서 보더라도 태조의 측근들이 얼마나 태종이방원을 증오하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태조이성계는함흥에 머물면서 이지란 등 측근과 함께 중앙 정부에 대항하여 군사를 일으킬 준비를 하였던 것 같다. 태종은 이러한 보고를 듣고 몹시 당황하여, 그해 4월 15일 다시 태조 때 영의정을 지낸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성석린(成石璘)을 불러서 부탁하기를, “태상왕이 본래 경을 중하게 여기니, 경의 말은 반드시 따를 것이다. 문안드린 끝에 은근한 말로 잘 아뢰어서 회가(回駕)하게 하라.” 하고, 늙은 성석린으로 하여금 함흥의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문안하게 하였다. 그러자, 태조이성계도 평소 존경하던 성석린의 간곡한 설득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그달 4월 28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태조이성계의 <제1차 함흥 주필(駐蹕)>은 약 50일 동안(1401년 윤3월 11일~1401년 4월 28일)이었는데, 이때 ‘함흥차사’로 내관이나 승려등 10여 명이 파견되었다.

1402년(태종 2) 4월 9일 북청에 머물던 이지란이 갑자기 죽었다. 여말선초에 태조이성계를 도와서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로를 세운 이지란의 죽음은 태조이성계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이지란은 북청(北靑: 靑海)을 중심으로 오늘날 함경북도 일대를 지배하던 여진족 대추장 퉁두란 티무르(童豆蘭帖木兒)였다. 젊었을 때 이성계는 이지란과 결의형제를 맺고, 이지란에게 처조카 강씨(康氏)를 시집보냈기 때문에, 처가 쪽으로 서로 친족 관계였다. 만약 여진족 대추장 이지란이 협력하지 않았으면, 이성계의 조선 건국은 사실상 어려웠을 것이다. 1402년 11월 1일 태상왕 이성계는 느닷없이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동북면으로 향하여 떠났는데, 그가 함흥에 도착한 바로 직후인, 11월 5일 안변부사조사의가 동북면 출신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 세자의 원수를 갚겠다고 성언(聲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조사의는 동북면의 군민(軍民)들과 제종 여진족의 지지를 받으면서 기세를 올렸는데, 여진족의 대부노릇을 하던 이지란이 살았을 때 이미 태조이성계의 밀지(密旨)를 받고 반란을 계획하고 전쟁을 준비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이때 태조이성계가 다시 함흥으로 간 것은 <조사의의 반란>을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조사의의 반란> 때 동북면의 여러 고을의 군민들이 모두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배후에는 토착여진과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 오도리족 등이 있었다.((이지란 신도비(李之蘭神道碑) 참조) 이들이 바로 이성계의 세력 기반인데, <조사의의 반란>은 중앙의 태종이방원과 동북면의 태조이성계의 세력 대결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조선의 <실록>에서는 이것을 간단하게 기록하거나, 아니면 태종에게 불리한 사실은 아예 기록에서 삭제하여 버렸다.

1402년 11월 5일 안변부사조사의 등이 군사를 일으키자마자, 11월 8일 태종은 즉시 상호군박순을 동북면에 보내어, 동북면 도순문사박만과 주군(州郡) 수령(守令)들에게 ‘조사의의 명령을 따르지 말라’고 교유(敎諭)하였으나, 박만 등은 태종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태상왕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순은 할 수 없이 용흥강(龍興江)을 건너서 함흥의 행재소로 가서 태상왕 이성계를 알현하고, 간곡히 서울로 돌아오도록 간청한 후, 강을 건너오다가 피살되었다. 11월 9일 태종은 태조의 스승 무학대사(無學大師)를 함흥의 행재소에 보내어, 태상왕에게 빨리 환가(還駕)하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태조이성계는 조사의 군사를 독려하면서 남하하였다. 조사의의 반란군이 맹주(孟州)에서 이천우(李天祐)의 관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평안도로 진군하자, 좌군 총제(左軍摠制)김계지(金繼志)와 우군 총제이밀(李密) 등이 반란군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조사의의 군사가 황급히 청천강을 건너다가 얼음이 깨져서 수백 명이 물에 빠져 죽으면서, 평안도 안주(安州)에 이르러 스스로 궤멸하였다. 그해 12월 2일 태상왕은 무학대사와 함께 평안도 평양부에 들어와서 머물다가, 12월 8일 무학대사의 권유로 서울로 돌아왔다. 태조가 서울로 돌아올 때 ‘살곶이 다리’에서 마중 나온 아들 태종이방원을 향하여 분노의 화살을 쏘았는데, 그 화살이 다리 난간에 꽂히었다는 유명한 설화가 그 지명과 함께 지금까지 전한다. 태조이성계의 <제2차 함흥 주필>은 약 40일 동안(1402년 11월 1일~1402년 12월 8일)이었는데, 이때는 전쟁 중이었으므로 ‘함흥차사’로 박순과 송류 2명만 파견되었다.

1406년(태종 6) 1월 나라에서 동북면 <조사의의 반란>을 진압한 공훈을 포상하였는데, 좌군 총제김계지와 우군 총제이밀이 1등 공신이 되고, 상호군박순과 호군송류가 2등 공신이 되었다. 이때 나라에서는, 죽은 박순에게 전지 40결(結)과 노비 4구(口)를 하사하였다.

성품과 일화

민정중(閔鼎重)이 지은 박순의 시장(諡狀)에는 그가 어려서부터 지조가 아주 확고하였으므로, 사람마다 절의(節義)가 있는 선비가 될 줄로 알았으며 그도 “임금을 섬길 때에 신하의 절개를 다하여야 한다.”라고 하며 항상 스스로 자부하였다고 한다. 또 시장에는 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하고 있다. 1402년(태조 2) 11월 안변부사조사의가 반란을 일으킬 무렵, 태종은 함흥에 머물고 있는 태조이성계에게 문안사를 보낼 사람을 물색하였다. 태종이 조회에 나와서 신하들에게 묻기를, “누구를 보내야 좋겠는가?” 하니,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박순이 선뜻 앞으로 나서면서, “신하가 임금을 위해 죽는 것은 바로 그 직분입니다.” 하고, 스스로 가겠다고 자청하였다. 태종은 그 사람됨을 아까워하여 처음에 매우 망설였다.

그가 떠날 때 사신(使臣)의 수레를 타지 않고 새끼 딸린 어미 말을 타고 함흥으로 들어가서, 행재소(行在所)가 보이는 곳에 일부러 새끼 말을 나무에다 매놓고 어미 말을 타고 들어갔다. 어미 말과 새끼 말이 서로 돌아보고 발버둥을 치면서 우느라고 한참동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태조가 이 광경을 바라보고 이상하게 여겼다. 이윽고 박순이 알현(謁見)을 청하자, 태조는 그와 어릴 적 친한 친구였으므로 곧바로 접견을 허락하고, 흔연히 만나서 옛날의 정을 나누고 주식(酒食)을 대접하였다. 태조가 묻기를, “방금 전에 새끼 말을 길가의 나무에 매어놓은 자가 그대였는가.”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행로(行路)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나무에다 매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어미와 새끼가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울어대니, 비록 보잘 것 없는 짐승이라도 지친(至親)의 정은 있는 모양입니다.” 하였다. 그는 이것을 가지고 넌지시 태조에게 간하여 그 마음을 움직여 보려고 한 것이다. 태조가 슬픈 안색을 짓다가 그를 붙잡고 보내지 않았으므로, 며칠 간 행재소에 묵었다.

어느 날 태조가 박순과 같이 장기를 두고 있었다. 그때 마침 새끼를 껴안은 어미 쥐가 옥상에서 떨어져서 죽었는데, 죽을 때까지 새끼를 놓지 않는 것을 보고, 그가 장기판을 밀쳐놓고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더욱 간절하게 이것저것 ‘풍간(諷諫)’ 곧 비유하여 간청하자, 태조가 아주 슬픈 안색을 띠면서 비로소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그에게 내비쳤다. 그가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태조의 ‘회필(回蹕)’ 윤허를 받고 곧바로 하직 인사를 하자, 태조는 그에게 빨리 떠나도록 하였다. 그때 행재소에서 태조를 모시고 있던 측근들이 그를 죽이자고 극력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태조가 한 동안 허락하지 않고 미루다가, 박순이 이미 용흥강을 다 건넜을 것으로 예상되자, 비로소 허락하고 사자(使者)에게 칼을 건네주면서, “만약 그가 이미 강을 건너갔으면 추격하지 말라.” 하였다. 태조는 옛날 죽마고우를 살려주고 싶어서 일부러 늦장을 부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 갑자기 발병이 나서 지체하다가 겨우 강가에 이르러 배에 올라타고 미처 강을 건너가지 못하고 사자에게 붙잡혀 살해되고 말았다. 박순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 태조는 눈물을 흘리면서, “박순은 나의 어릴 때 친구다. 내가 엊그제 그와 약속한 말을 잊어버리지 않겠다.” 하고, 서울로 돌아갈 뜻을 굳혔다고 한다.

한편 『약천집(藥川集)』 권13에는 이 일화에 관한 남구만(南九萬)의 생각이 있다. 1687년(숙종 13) 박순에게 시호를 내리는 문제를 논의할 때 영의정남구만(南九萬)이 주장하기를, “박순의 시장(諡狀)에 보면, 박순이 풍간(諷諫)하여 태조가 회필(回蹕)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일을 자세히 기록하여 이를 그 공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실록을 살펴보면, 태조가 회필을 허락한 기록이 없고, 이선(李選)의 차자(箚子)를 보면, ‘박순이 죽은 뒤에 태조가 결심하고 회필한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때 변고가 많아서 호군(護軍)송류(宋琉)도 함흥에 갔다가 뒤따라 죽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시장의 내용과 서로 다릅니다.” 하였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는 박순이 죽을 때의 안타까운 장면을 누군가 시로 읊었는데 그 시에 “반 토막은 강 속에 있고 반 토막은 배 안에 있다네.[半在江中 半在船]”라 하였고, 그 시는 지금까지 전해져서 거리에서 아이들이 노래한다고 하였다.

<조사의의 반란>에 대한 역사적 평가

고려 말엽에 대륙에서 원(元)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고 해안에서 왜구가 창궐하던 혼란한 시기에 이성계가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동정서벌하여 위기의 고려를 구원하였다. 이성계의 군사는 동북면의 고려 군민(軍民)들과 여진족으로 구성되었는데, 여진족은 두만강 내외 지역뿐만 아니라, 만주 내지(內地)에 살던 오도리족·오랑캐족 등의 대소 대추장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강북의 오도리족의 대추장 퉁멍거 티무르(童猛哥帖木兒), 오랑캐족의 대추장 어허추(阿哈出)는 물론이고, 강남의 삼산(參山: 북청) 천호(千戶)퉁두란 티무르(童豆蘭帖木兒) 즉 이지란(李芝蘭) 등 두만강 내외에 살던 30여 명의 대추장들이었다.(『태조실록(太祖實錄)』권8 참조) 이들 30여 명의 추장들이 지배하던 지역을 보면, 두만강 내외 지역에서 두만강 이북의 목단강(牧丹江)·수분하(綏芬河)·송화강(松花江)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말하자면, 목단강(牧丹江)의 동쪽 지역 송화강의 남쪽 지역, 옛날 발해의 중심지인 이른바 “만주의 동부 지역”이 이성계의 세력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태조이성계는 조선을 세우고 즉위한 직후에, 여진족의 대소 추장들에게 만호(萬戶)천호(千戶)의 직위를 주고 여진족을 후대하였다. 1393년(태조 2) 태조이성계와 이지란의 토착 여진으로 구성된 동북면 출신의 사병들은 대다수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로 통합되었다. 또 동북면 출신 개국공신 이지란을 동북면(東北面)으로 보내어 여러 여진족들을 초무(招撫)하여 여진족의 풍속을 바로잡고, 여진족이 조선인과 서로 혼인하는 것을 장려하였다. 동북면의 토착 여진족은 조선의 백성과 다름이 없었고, 모두 조선의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 여진족은 자기들 추장에게 부역하기를 부끄러워하고, 오히려 조선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태조 이성계 시대에는 동북면의 여진족을 조선인으로 동화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그 결과 조선은 두만강 하류 공주(孔州)에서 갑산(甲山)에 이르기까지 두만강 연안에 읍(邑)과 진(鎭)을 설치하고, 군사를 주둔시켜 두만강 1천리의 땅을 모두 조선의 영토로 만들었던 것이다.(『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7권 53장 참조)

태조이성계는 여진족에 대한 동화정책을 추진하여 조선과 여진과의 관계가 매우 원만하였다. 그러나 태조이성계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태종이방원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여진족의 대소 추장들이 이성계에게는 여전히 충성하였으나, 태종이방원에게는 모두 등을 돌렸다.

<제 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신덕왕후 강씨의 세력이 몰락하고, 태종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1402년(태종 2) 11월 안변부사조사의가 신덕왕후 강씨와 죽은 세자 이방석의 원한을 갚는다고 하면서, 동북면의 여진족들을 이끌고 중앙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조사의의 반란>은 동북면 일대에 살던 이성계·이지란의 가별초(家別抄: 궁사)만 가담한 것이 아니라, 여진의 오도리족·오랑캐족 등의 대소 추장들이 대부분 가담하였다. 태종은 군사를 보내어 평안도 안주에서 <조사의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조선과 여진족의 관계는 <조사의의 반란>을 계기로 크게 악화되어, 오랑캐족과 오도리족이 차례로 조선을 배반하고, 명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묘소와 제향

1686년(숙종 12) 12월 나라에서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처음에 박순이 비참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태종은 매우 비통해하며, “틀림없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도 가겠다고 자청하였으니, 그의 충성과 용맹이 옛날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 하고, 곧바로 벼슬을 중추부(中樞府)판사(判事)로 추증(追增)하고, 토지와 노비를 그 가족에게 하사하였다. 또 화공(畵工)을 불러서 박순의 반신(半身)을 그리게 하고 그 공적을 기록하여 사당에 걸도록 하였다. 뒤에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그 묘표(墓表)를, 노봉(老峯)민정중(閔鼎重)이 그 시장(諡狀)을 각각 지었다. 그는 함흥(咸興)의 용강사(龍江祠)에 제향되었다.

그의 부인 장흥임씨(長興任氏)는 고려 대사헌(大司憲)임헌(任獻)의 딸인데, 박순이 함흥으로 떠난 뒤로부터 주야로 하늘에 기도하다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무덤은 경기도 고양군 벽재면 성석리 감내에 있는데, 뒤에 우암송시열이 그 묘표(墓表)를 지었다.

처음에 박순이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을 때 태조이성계가 그 시신을 수습하여 용흥강가에다 묻어주게 하였다. 뒤에 부인 임씨의 상(喪)을 당하자, 태종이 특별히 묘지를 하사하여 예장(禮葬)을 치르도록 하고, 아울러 그의 고향에 충신(忠臣)·열녀(烈女)의 두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다. 박순의 옛 집은 고양(高陽)과 교하(交河)의 경계에 있었는데, 지금까지 그 마을을 부사문(府事門)이라고 부른다. 후손들이 몇 차례 사당을 옮겼는데, 충청도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 박순의 충신문(忠臣門)과 그 부인 임씨(任氏)의 열녀문(烈女門)이 있다.

자녀는 2남을 두었는데, 맏아들 박흔(朴昕)은 감찰(監察)과 참판을 지냈고, 둘째아들 박소(朴昭)는 좌승지를 지냈다. 그 손자 박숙진(朴叔蓁)은 대사헌을 지냈고, 손자 박숙무(朴叔楙)는 목사(牧使)를 지냈고, 손자 박숙달(朴叔達)는 사헌부 집의(執義)와 예조 참의를 지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정종실록(定宗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약천집(藥川集)』
  • 『송자대전(宋子大典)』
  • 『노봉집(老峯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음성읍지(陰珹邑誌)』
  • 『음성박씨(陰珹朴氏) 족보』
  • 『장흥임씨(長興任氏) 족보』
  • 『청해이씨(靑海李氏) 족보』
  • 「이지란 신도비(李之蘭神道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