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진(朴叔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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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24년(세종 6)~1481년(성종 12) = 58세]. 조선 전기 세종~성종 때 활동한 문신.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자는 정지(挺之)이다. 본관은 음성(陰城)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조부는 이조 판서박순(朴淳)이고, 아버지는 증 병조 판서박흔(朴昕)이며, 어머니 천안 전씨(天安全氏)는 부사(府使)전경(全卿)의 딸이다. 부인 연안 김씨(延安金氏)는 김치지(金致知)의 딸이다.

세종~세조 시대 활동

1447년(세종 2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사용(司勇)으로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가 되었다. 1455년(세조 1) 12월 권지 정자로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等)에 책록되었다. 1464년(세조 10) 정랑(正郞)으로 대책(對策)에 3등으로 합격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8일 병조 정랑으로 정비(政批)에 안인(安印)할 때 병조 정랑구치동(丘致峒), 좌랑(佐郞)손소(孫昭) · 최한정(崔漢禎) · 최경지(崔敬止) 등과 제수(除授)할 비목(批目)의 초안(草案)을 서리(胥吏)에게 맡긴 채 마음대로 먼저 귀가(歸家)하였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465년(세조 11) 2월에 다시 서용되었고, 같은 해 5월에 『육전(六典)』을 수교(讎校)할 때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으로 병조 판서김질(金礩)과 함께 병전(兵典)을 교정하였다. 1467년(세조 13) 12월에는 병조 정랑으로 동빙고(東氷庫)를 살펴보고 돌아왔다.

성종 시대 활동

1470년(성종 1) 10월 사은사(謝恩使)좌의정김국광(金國光)과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1471년(성종 2)에 군기시(軍器寺)정(正)이 되었다. 이때 아마(兒馬) 1필(匹)을 하사받았다. 1472년(성종 3) 1월에 명을 받고 군기시 정으로 영안도(永安道)에 가서 관찰사 · 절도사(節度使)를 선위(宣慰)하였다. 1473년(성종 4)에 통례원(通禮院) 좌통례(左通禮)가 되었다. 1474년(성종 5) 6월에는 국장(國葬)에 공이 있다 하여 낭청(郎廳)으로 녹피녹피(鹿皮) 1장을 하사받았고, 그 해 8월에는 흉년이 들자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으로 충청좌도(忠淸左道)와 경상우도(慶尙右道)에 파견되어 실정을 살폈다. 1475년(성종 6) 1월에는 좌통례로 아마 1필을 하사받았다. 그 해 9월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가 되었다. 1477년(성종 8) 4월 통정대부(通政大夫) 형조 참의가 되었고, 그 해 8월 중순에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으며, 같은 해 8월 하순에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1478년(성종 9) 4월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는데, 그 해 8월에 아마 1필을 하사받았다. 그 해 9월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그 해 11월에는 가정대부(嘉靖大夫)이조 참판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숙마(熟馬) 1필을 하사받았다. 1479년(성종 10) 5월 가정대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가 하루 만에 가정대부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그 해 8월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어 1481년(성종 12)까지 하였다. 경기도 관찰사를 겸임하였다. 이 해 세상을 떠나니 나이 58세이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음성 박씨 세보(陰城朴氏世譜)』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
  • 『사마방목(司馬榜目)』「정통 12년 아 세종대왕 29년 정묘식(正統十二年我世宗大王二十九年丁卯式)」(하버드옌칭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