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린(盧慶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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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16년(중종11)∼1568년(선조1) = 53세].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인보(仁甫), 호는 사인당(四印堂)이다. 본관은 곡산(谷山)이고, 세거지는 황해도 해주(海州)이다. 아버지는 사과(司果)노적(盧積)이고, 어머니 풍천임씨(豊川林氏)는 내금위(內禁衛)임중(任重)의 딸이다. 세종 때 유명한 의학자 노중례(盧重禮)의 증손자이고, 율곡(栗谷)이이(李珥)의 장인이다.

중종~명종 시대 활동

1539년(중종34)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4세였다. 성균관(成均館)학유(學諭)에 보임되어 학록(學錄) · 학정(學正) · 박사(博士)로 승진하였고, 공조 · 형조 · 호조 · 예조 4조(曺)의 낭관(郎官)을 거쳐,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 ·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로 나갔다. 1549년(명종4) 형조 정랑을 거쳐, 1550년(명종5)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친구 진복창(陳復昌)에게 탄핵을 당하여 좌천되었다. 장악원(掌樂院) · 종부시(宗簿寺)첨정(僉正)을 거쳐, 1553년(명종8)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나갔으나, 평안도도사로 있을 때 양계(兩界)의 관비(官婢)를 솔축(率畜)한 죄가 드러나서 파직되었다. 그 뒤에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나가서 유학을 장려하고 학문을 권장하면서 ‘천곡서원(川谷書院)’과 ‘영봉서원(迎鳳書院)’을 창건하였는데, 서원이 거의 없던 시대에 서원을 지어서 고을 선비들에게 공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여 주었다. 1557년(명종12) 율곡이이를 맏사위로 맞았다. 그 뒤에 종부시 정에 임명되었다가, 숙천부사(肅川府使)로 나갔는데, 1564년(명종14) 그 치적(治績)이 훌륭하다는 보고를 받은 명종이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그의 자급을 올려주었다. 그러나 1566년(명종21) 반대파의 무함을 받아서 삭탈관직(削奪官職)당하고, 고향 해주(海州)의 옛 집으로 돌아와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1568년(선조1) 병에 걸려 서울의 의원을 찾아와 치료하다가 효험이 없어 4월 22일 서울 양덕방(陽德坊)의 집에서 죽으니, 향년이 53세였다.

서원의 창건

그가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재임할 때, 유학을 장려하고 학문을 권장하기 위하여 서원(書院)을 창건하였다. 서원은 선현(先賢)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면서 고을의 자제들을 모아서 유학을 교육하는 사설 교육 수련장이었다. 1542년(중종37) 풍기(豊基) 군수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지은 것이 최초의 서원이었다. 1550년(명종5) 퇴계(退溪)이황(李滉)이 명종에게 건의하여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扁額)을 하사하고 토지와 노비를 내려주어 학문을 장려하게 하였다. 바로 이때 성주목사노경린은 이황의 학문을 권장하는 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천곡서원과 영봉서원을 창건하였고 고을의 선비들이 분발하여 학문을 공부하도록 장려하였다. 그는 먼저 이천(伊川)과 운곡(雲谷) 사이에 서원을 짓고 선비들이 모여서 수련하는 장소로 삼게 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원장(院長)이 되어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의 이황에게 간청하니, 이황이 그 서원의 이름을 ‘천곡서원’이라고 짓고 현판까지 써서 주었다.(『퇴계집(退溪集)』 권48) 한편 그는 성주목사로 있을 때 율곡이이를 맏사위로 맞았다. 노경린이 죽고 난 뒤에 선조 때부터 동인과 서인이 치열한 당파 싸움을 전개하는데, 퇴계이황의 제자들은 동인의 주축이 되었고, 율곡이이는 서인의 영수가 되었다. 노경린이 성주에 세운 천곡서원과 영봉서원에서 공부한 영남 선비들은 모두 동인이 되어서 이이의 적대 세력이 되었다. 명종 시대에는 전국에 30여 곳에 불과하던 서원이 선조 이후, 전국 8도에 서원이 없는 고을이 없을 만큼 수백 곳으로 늘어나서, 당쟁의 소굴로 변하고 말았다.

성품과 일화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인자(仁慈)하면서도 지조를 굳게 지켰다. 내키는 대로 곧바로 행동하고 혐의를 피하지 않았다. 선(善)을 좋아하고 선비를 아꼈지만, 성격이 준엄하여 선비다운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교유(交遊)하는 범위가 좁았다. 일은 정밀하고 분명하게 처리하였으므로, 말은 하지 않으면서도 행정을 잘 수행하였다.

1550년(명종5)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대간(臺諫)의 탄핵을 당하여 좌천되었는데, 그 배후를 알고 보니 수초(遂初)진복창이었다. 진복창은 문장이 뛰어나고 재예가 넘쳤기 때문에, 노경린은 진복창과 젊었을 때 서로 친하게 지냈다. 진복창이 과거에 합격하여 출세하게 되면서부터 서로 왕래가 드물어졌다. 진복창이 대윤(大尹)윤원형(尹元衡)의 앞잡이가 되어서 사림파(士林派)의 선비를 많이 죽이자 노경린은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서 만나보라는 주변의 권유를 거절하였다. 그래서 진복창이 그에게 감정을 품고 그가 벼슬에 진출하는 것을 방해하여, 그는 청요직(淸要職)에 오르지 못하고 외방의 수령으로 나가게 되었다. 또 윤원형이 싫어한다며, 진복창은 구수담(具壽聃)을 역적으로 몰아 사사(賜死)시켰는데, 구수담은 노경린의 스승으로서 그를 추천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진복창도 윤원형의 미움을 받아서 1553년(명종8) 함경도 삼수(三水)로 귀양가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죽었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서울 우이산(牛耳山) 기슭 선영에 있는데, 맏사위 율곡이이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첫째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선공감(繕工監)정(正)김한로(金漢老)의 딸인데, 자녀는 3녀를 두었고, 둘째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윤상림(尹商霖)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두었다. 장녀는 이조 판서이이의 부인이 되었고, 2녀는 종실의 덕원수(德原守)이경의(李鏡義)의 부인이 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율곡전서(栗谷全書)』
  • 『퇴계집(退溪集)』
  • 『포저집(浦渚集)』
  • 『혼정편록(混定編錄)』
  • 『소고집(嘯皐集)』
  • 『우복집(愚伏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