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유(學諭)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성균관에 소속된 종9품 관직.

개설

학유(學諭)는 조선시대 성균관에 소속된 종9품 관직으로, 1392년(태조 1)에 유생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학유는 성균관 내에서의 교육 활동 이외에도 지방에 파견되어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고, 양현고(養賢庫)녹사(錄事)를 겸하였으며, 각종 시험에 시관(試官)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성균관이 개정된 1895년(고종 32)에 혁파된 것으로 보인다.

담당 직무

문과 급제자는 정식 관직에 나아가기에 앞서 분관(分館)이라 하여 성균관과 교서관, 승문원 등에 권지(權知) 직함을 띠고 나아갔다. 학유는 성균관에 분관된 과거 급제자에게 제수하던 관직으로 권지학유라 하였다. 권지학유로 제수된 자들은 지방에 파견되었는데, 지역의 유학 교육을 위해 유학교수(儒學敎授)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유학교수로 파견되었던 학유에 대한 고과는 해당 도의 관찰사가 살피도록 하였다. (『태종실록』 7년 1월 23일).

그런 만큼 상당히 경학에 조예가 깊은 자에게 학유를 제수했는데, 예를 들어 1483년(성종 14)에 안윤덕(安潤德)이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 승문원에 보임(補任)하였으나 당시 조정에서 안윤덕이 경학에 조예가 깊다는 논의가 있어 학유로 바꾸어 제수한 적이 있다. 반대로 몸가짐이 조신하지 않으면 파직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35년 8월 23일).

한편 본래의 업무 이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학유는 1412년(태종 12)부터 성균관 유생의 공궤(供饋)를 위한 미곡과 어물이나 채소 등을 출납하던 양현고의 녹사나 직장(直長)·봉사(奉事) 등을 겸하여 감독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2년 5월 11일). 또한 차지관(次地官)으로서 성균관에서 치러지는 관시(館試)의 시관으로 활동하거나(『명종실록』 1년 3월 24일), 문과의 차비관으로 차출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8년 9월 21일). 중국의 요동도사(遼東都司)자문(咨文)을 가지고 파견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9년 5월 22일).

변천

1392년 7월 28일 문무백관의 관제를 반포할 때 성균관이 설치되었으며, 이때 학유는 정원 4명의 종9품 관직으로 설치되었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1466년(세조 12) 1월 정원 중 2명을 줄였으나, 이후 간행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정원 3명의 종9품 관직으로 규정되었다. 아울러 『경국대전』에서는 학유를 포함, 성균관 소속의 정7품 박사(博士) 이하 관직은 의정부 소속의 사록(司祿) 1명과 봉상시의 직장 2명이 겸임하도록 규정하였다. 조선후기에는 겸학유(兼學諭) 3명이 증설되기도 하였다.

학유는 이후 큰 변화가 없이 그대로 유지되다가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 과정에서 성균관의 성격이 변화되고 이어 1895년에 종전의 관직이 폐지되면서 새롭게 성균관의 직제가 마련될 때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태학지(太學志)』
  • 『정록(政錄)』
  • 신석호, 「이조초기의 성균관의 정비와 그 실태」, 『대동문화연구』 6·7, 1970.
  • 이성무, 「선초의 성균관 연구」, 『역사학보』 35·36, 196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