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도사(遼東都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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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 요동에 설치된 최고 군정기관.

개설

원말 명은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요동에 요동도사를 설치하였다. 요동도사는 군정합일기관으로 홍무 연간의 적극적 요동 경략, 영락 연간의 몽골[蒙古]과 여진족에 대한 회유, 조선과의 국경 문제 및 범월, 밀교역 등 다양한 문제로 조·명 관계는 요동도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내용 및 특징

명 홍무제는 1371년(홍무 4)에 산동의 해로를 통하여 요양과 심양을 점령 후 정요도지휘사사(定遼都指揮使司)를 설치하고, 1375년(홍무 8)에 정요도위(定遼都衛)를 요동도지휘사(遼東都指揮使司)로 개편하였다. 1377년(홍무 10)에 요동도사 소속 주현(州縣)을 모두 군사 체계의 위로 개편하는 등 군사적 성격을 강화하였다. 이 시기에 명은 요동도사 휘하에 12위를 설치하여 동북 지역에 대한 전략적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1386년(홍무 19)의 금산전역(金山戰役)을 전후하여 요동은 25위 체제로 개편되었다. 명의 요동도사 설치 목적은 변방의 지리적 요소, 희소한 인구, 지리적인 형세, 다수의 이민족 거주 등이었다. 요동도사의 감찰·사법·조세 등은 전적으로 산동 지역에 의존하였다.

명은 요동정책과 여진 관계에 있어 조선을 견제하였는데, 요동도사를 통하여 실현되었다. 요동도사는 명의 대조선 외교 창구의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여진족에 대한 회유와 경계의 주체였다. 직접 중국 사신이 파견되지 않으면, 중국의 외교문서를 조선에 전달하는 일을 전담하였다.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조공 체제에서 조공국은 결국 책봉국의 문서 체계에 영향을 받아 행이 체계에 있어 왕은 요동도사로부터 공문을 접수하였다.

요동도사는 대조선 관계에서 여진정책 및 유민정책을 두고 지속적으로 충돌하고, 물품교역, 정보수집, 범월(犯越), 밀무역, 사행의 지송 등에 있어 매우 밀접한 명 관청이었다. 조선사행의 여정에 있어 요동도사는 수레의 운반 및 호송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공문의 행이 체계에서 요동도사는 조선에 명의 외교문서를 전달하는 역할이 있었다.

의의

요동도사는 군정합일의 운영으로 25개 위소(衛所)를 거느린 요동 지역 최고의 기관이었다. 군사·정치적 특징뿐만 아니라 각종 교역과 사행무역을 통하여 요동도사와 조선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외교문서의 전달 체계에 있으며, 조선은 요동도사를 통하여 전달받을 수 있었다.

참고문헌

  • 『통문관지(通文館志)』
  • 『청조통전(淸朝通典)』
  • 남의현, 「명대 요동지배체제의 특징에 관한 분석」, 『강원사학』 22~23합집, 2008.
  • 서인범, 「명대의 요동도사와 동녕위」, 『명청사연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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