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중(任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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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18년(광해군 10)~1657년(효종 8) = 40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효종(孝宗)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과 임파현령((臨坡縣令) 등을 지냈다. 자는 정경(鼎卿)이었다가 정숙(鼎叔)으로 고쳤다. 본관은 풍천(豐川)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영흥부사(永興府使)를 지낸 임선백(任善伯)이고, 어머니 강릉 김씨(江陵金氏)는 현감(縣監)김응명(金應命)의 딸이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1633년(인조 11)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하여 16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었고, 22세 때인 1639년(인조 17)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1640년(인조 18) 승정원(承政院)가주서(假注書)로 임명되었고, 1642년(인조 20)에는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과 공조 좌랑(佐郞)에 연이어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8년 7월 5일, 인조 20년 1월 6일, 인조 20년 12월 4일] 1644년(인조 22)에는 경기도사(京畿都事)가 되었으며, 이후 성균관 전적과 병조 정랑(正郞)을 지냈다.[『승정원일기』인조 22년 4월 19일, 인조 23년 5월 20일, 인조 24년 9월 9일] 1647년(인조 25)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임명된 후 1649년(인조 27)까지 사헌부 지평 및 사간원 정언을 역임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25년 1월 25일, 인조 26년 4월 28일, 인조 26년 10월 26일, 인조 27년 1월 11일, 4월 10일)

인조 대에 이어 효종 대에도 사헌부 지평으로 활약하여 1649(효종 즉위년) 동료들과 영의정김자점(金自點)과 그 일파를 탄핵하였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즉위년 6월 16일, 효종 즉위년 9월 13일] 이러던 가운데 김자점 일파로 지목된 황호(黃㦿)와 신면(申冕)을 변론하다가 송준길(宋浚吉) 등의 비판을 받고 체차되었다.[『효종실록』효종 즉위년 9월 13일] 이후 1651년(효종 2)까지 암행어사와 사헌부 지평,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으로 활동하다가, 1652년(효종 3) 임파현령(臨坡縣令)으로 부임하였으나, 1654년(효종 5) 어머니의 병으로 상경하게 되면서 사직하였다.[『효종실록』효종 즉위년 11월 7일, 효종 1년 6월 5일, 효종 1년 윤 11월 17일, 『승정원일기』효종 2년 8월 5일, 효종 3년 3월 17일, 효종 5년 9월 29일] 그러다가 이듬해인 1655년(효종 6) 성균관 직강(直講)으로 임명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경상도사(慶尙都事)로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효종 6년 3월 20일, 효종 6년 7월 15일] 그러나 병이 심하여 이듬해 1656년(효종 7) 사직하였다. 이때 아버지 임선백이 세상을 떠났는데, 영구(靈柩)를 모시고 오다가 임중 역시 병이 더욱 깊어져 1657년(효종 8)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염헌집(恬軒集)』 권33 「선부군묘지(先府君墓誌)」]

한편 임중은 1682년(숙종 8) 첫째 아들 임상원(任相元)이 참판(參判)이 된 후 이조 참판에 추증(追贈)되었다.[『염헌집』 권33 「선부군묘지」]

묘소와 후손

임중의 묘소는 경기도광주시 선영(先塋)에 조성되었는데, 첫째 아들 임상원이 지은 묘표와 묘지명이 남아있다.[『염헌집』 권32 「선부군묘표(先府君墓表)」, 권33 「선부군묘지」]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종실(宗室)인 의창군(義昌君)의 7대손으로 목사(牧使)이경생(李更生)의 딸이다. 자녀는 3남을 두었다. 첫째 아들 임상원은 참판과 대사헌(大司憲),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지냈고, 둘째 아들 임찬원(任贊元)은 봉사(奉事)이며, 막내 아들 임익원(任翊元)은 문과에 급제하여 도사(都事)를 지냈다.[『염헌집』 권32 「선조고 영흥대도호부사부군 묘표(先祖考永興大都護府使府君墓表)」, 권33 「선부군묘지명」]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염헌집(恬軒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