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종(天台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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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대의 7개 불교 종파 중 하나로, 선종에 속한 종파.

개설

천태종(天台宗)은 1097년 대각(大覺) 국사(國師)의천(義天)에 의해 선종의 한 종파로 창종(創宗)되었으며, 교종을 대표하는 화엄종(華嚴宗)과 법상종(法相宗), 선종에 속하는 조계종(曹溪宗)과 함께 4대 종파를 이루었다. 고려시대 후기의 오교양종에서 양종은 선종에 속한 천태종과 조계종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종대의 11개 종파에서는 소자종(疏字宗)과 법사종(法事宗)으로 구분되었고 7개 종파로 축소될 때 다시 천태종으로 합쳐졌다. 세종대에는 조계종 등과 함께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선종으로 통합되었다.

설립 배경 및 연원

천태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인 『법화경(法華經)』과, 중국 천태종의 개종조(開宗祖)인 지의(智顗)가 창시한 천태 교학은 신라시대에 이미 전래되었다. 이후 고려 광종대에는 중국에서 산실된 천태종 관련 전적(典籍)을 중국에 전하여, 송나라 때 천태종이 부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 당시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지은 제관(諦觀)과, 뒷날 중국 천태종의 제16조가 되는 의통(義通) 등의 고려 승려가 중국에 가서 활동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천태종이 종파로서 성립된 것은 1097년(고려 숙종 2) 대각 국사의천에 의해서였다. 고려문종의 넷째 왕자이자 숙종의 동생인 의천은 원래 화엄종의 승려였으나, 중국에 유학하고 돌아온 뒤 교학과 관행(觀行)의 일치를 추구하며 천태종을 창건하였다. 천태종은 왕실의 지원을 받고 국청사(國淸寺)를 본사로 삼아 창건되었는데, 선종에 속하였으며 독자적인 승과(僧科)를 실시하였다.

의천 사후 천태종은 교웅(敎雄), 덕소(德素) 등이 주도하면서 조계종과 더불어 오교양종의 양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선종을 대표하는 종파인 조계종에 밀려 점차 약세에 처하였다. 그 후 1216년(고려 고종 3)에 요세(了世)가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열고 활발한 활동을 펼치면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만들었다. 요세는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실천하고 선과 교를 겸비한 천태 교학을 유포하였는데, 천인(天因)과 천책(天頙) 등이 그를 계승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392년(태조 1)에 태조가 연 건국 기념 법회에 천태종 승려 330명이 참석하였고, 1394년(태조 3)에는 천태종의 조구(祖丘)가 조선시대의 처음이자 마지막 국사(國師)가 되었다. 이후 태종대에는 억불 정책을 단행하면서 1406년(태종 6)에 11개 종파의 242개 사찰만을 공인하고 해당 사찰의 사사전(寺社田)사사노비(寺社奴婢)의 보유를 허용하는 대신, 그 밖의 사찰에 속한 수조지와 노비는 모두 속공(屬公)하였다. 11개 종파는 천태종 계통인 소자종과 법사종을 비롯해 조계종·화엄종·도문종(道門宗)·자은종(慈恩宗)·중도종(中道宗)·신인종(神印宗)·총지종(摠持宗)·남산종(南山宗)·시흥종(始興宗) 등이었다. 이때 천태소자종과 법사종에 속한 사찰은 도합 43개소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태종실록』 6년 3월 27일).

1407년(태종 7)에는 11개 종파가 다시 7개 종파로 축소되었다. 천태소자종과 법사종은 천태종으로 통합되었고, 중도종과 신인종은 중신종(中神宗), 총지종과 남산종은 총남종(摠南宗)이 되었다. 도문종은 화엄종에 포함되었으며, 조계종·자은종·시흥종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와 더불어 자복사(資福寺) 88개를 산중의 명찰(名刹)로 대체하였다. 천태종의 경우에는 43개 공인 사찰 중 17개 사찰이 충주 엄정사(嚴正寺), 초계 백암사(白巖寺), 태산 흥룡사(興龍寺), 정산 계봉사(鷄鳳寺), 영평 백운사(白雲寺), 광주(廣州) 청계사(淸溪寺), 영해 우장사(雨長寺), 대구 용천사(龍泉寺), 도강 무위사(無爲寺), 운봉 원수사(原水寺), 대흥 송림사(松林寺), 문화 구업사(區業寺), 금산 진흥사(眞興寺), 무안 대굴사(大崛寺), 장사 선운사(禪雲寺), 제주(堤州) 장락사(長樂寺), 용구 서봉사(瑞峰寺) 등이 새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이후 세종대인 1424년(세종 6)에는 7개 종파가 다시 선교양종으로 통폐합되었다. 천태종은 조계종·총남종과 함께 선종으로 편입되었고, 화엄종·자은종·중신종·시흥종은 교종으로 통합되었다. 또한 고려시대 이래로 승려의 인사 문제와 불교 교단 관리를 주관하던 승록사(僧錄司)가 폐지되고, 그 대신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都會所)가 각각 서울의 흥천사(興天寺)흥덕사(興德寺)에 설치되었다. 이때 선종과 교종은 각각 18개씩, 총 36개의 사찰이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았다. 승려 수는 선종 1,950명, 교종 1,800명으로 총 3,750명이었으며, 사전(寺田)은 선종 4,200여 결, 교종 3,700결로 합계 7,900여 결이 허용되었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천태종은 이로써 사라지게 되었지만, 16세기까지 법화 및 천태 교학을 중시하는 전법 계보가 이어지는 등 천태의 교판(敎判)과 교학은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 「흥왕사대각국사묘지명(興王寺大覺國師墓誌銘)」
  • 김갑주, 『조선시대사원경제연구』, 동화출판, 1983.
  • 김영수, 『조선불교사고』, 중앙불교전문학교, 1939.
  •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임제법통과 교학전통』, 신구문화사, 2010.
  •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한국천태사상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1983.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김영수, 「오교양종에 대하여」, 『진단학보』8, 1937.
  • 김용태, 「조선전기 억불정책의 전개와 사원경제의 변화상」, 『조선시대사학보』58, 2011.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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