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종(神印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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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의 11개 불교 종파 중 하나로, 밀교(密敎) 계통의 교종 종파.

개설

신인종(神印宗)은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으로 잘 알려진 신라의 명랑(明朗)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종파로서 성립되었음을 보여 주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신인종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초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태종 연간에 11개의 불교 종파를 7개로 축소할 때, 중도종(中道宗)과 합쳐져 중신종(中神宗)이 되었다. 그 뒤 세종대에 기존 종파를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화엄종(華嚴宗)·자은종(慈恩宗)·시흥종(始興宗)과 함께 교종에 편제되었다.

내용 및 변천

신인종은 신라의 명랑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명랑은 삼국 통일 직후인 674년(신라 문무왕 14)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침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경주 낭산(狼山)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립하려 하였다. 그런데 사찰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당나라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에 임시로 비단으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五方)의 신상(神像)을 만든 뒤, 유가(瑜伽) 승려 12명과 함께 문두루비법으로 기원을 하자 당나라 군선이 모두 침몰했다고 한다. 사천왕사는 679년(신라 문무왕 19)에 완공되었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광학(廣學)과 대연(大緣)이 문두루비법을 써서 적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태조 왕건(王建)이 현성사(現聖寺)를 세웠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고려시대에도 명랑을 계승한 밀교 계통의 종파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종파가 성립되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종대에 억불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11개 종파의 242개 사찰만 토지 및 노비의 소유를 인정받았다. 이때 신인종의 명칭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11개 종파는 신인종을 비롯해 조계종(曹溪宗)·총지종(摠持宗)·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법사종(法事宗)·화엄종·도문종(道門宗)·자은종·남산종(南山宗)·시흥종·중도종 등이었다. 그 당시 신인종과 중도종은 합쳐서 30개의 소속 사찰이 공인을 받았다(『태종실록』 6년 3월 27일).

이어 1407년(태종 7)에는 11개 종파가 다시 7개로 축소, 통합되었다. 시흥종·조계종·자은종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신인종은 중도종과 통합되어 중신종이 되었다. 천태소자종과 법사종은 천태종으로, 총지종과 남산종은 총남종(摠南宗)으로 통합되었으며, 도문종은 화엄종에 포함되었다. 이때 88개의 자복사(資福寺)를 명찰(名刹)로 대체하였는데, 중신종에서는 임실 진구사(珍丘寺), 함흥 군니사(君尼寺), 아주 동림사(桐林寺), 청주 보경사(菩慶寺), 봉화 태자사(太子寺), 고성 법천사(法泉寺), 배주 견불사(見佛寺), 익주 미륵사(彌勒寺) 등이 새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중신종은 이후 세종대인 1424년(세종 6)에 7개 종파를 다시 선교양종으로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화엄종·자은종·시흥종과 함께 교종에 포함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김영수, 『조선불교사고』, 중앙불교전문학교, 1939.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 忽滑谷快天, 『朝鮮禪敎史』, 春秋社,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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