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천사(法泉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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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88개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명봉산에 있었던 절.

개설

법천사(法泉寺)는 통일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절로 8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기와가 출토되었으며, 진관(眞觀) 선사(禪師) 석초(釋超)가 928년(신라 경순왕 2)에 법천사의 현권(賢眷) 율사(律師)로부터 계를 받은 사실이 확인된다. 신라하대에 이 지역을 대표하는 관단사원(官壇寺院)이 있던 절이었다. 이후 고려 때 지광 국사 해린(海麟)이 주석하면서 법상종 사찰로 크게 발전했다. 조선 태종 때 화엄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된 지방 명찰(名刹)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폐사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고려시대

고려 덕종 때 혜소 국사 정현(鼎賢)이 법천사의 주지로 있었다. 지광 국사 해린(海麟)이 어린 시절 법천사에서 관웅(寬雄)에게 수업을 받았고, 그가 국사에 책봉된 후 1067년(고려 문종 21) 이 절로 돌아와 3년간 머무르다가 입적했다. 1085년(고려 선종 2) 해린의 제자인 소현의 주도 아래 법천사에 지광국사부도탑과 탑비가 조성되었다. 이때가 법천사의 최고 융성기였다.

(2) 조선시대

1407년(태종 7) 12월, 원주(原州) 법천사가 화엄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의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던 것인데, 원주 법천사는 화엄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의 안녕과 고을의 복을 빌기 위해 지정한 사찰이었므로 당시 법천사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또 법상종 사찰이던 것이 화엄종 사찰로 바뀐 것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전기의 학자 유방선이 법천사에 은거하면서 서거정, 한명회, 권람, 강효문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법천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현대

현재는 절터만 전한다. 이에 대한 조사는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처음 이루어졌고, 196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절터 전체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본격적인 발굴 조사는 강원문화재연구소가 2001년부터 2013년까지 8차에 걸쳐 진행하였다. 그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기의 건물지 40동과 우물지 3개소, 석축 및 담장유구, 계단지를 비롯하여 금동불입상, 연화대석, 각종 기와류 및 자기류 등의 유물이 나왔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거대 사찰 규모인데, 특히 건물 수로는 가장 큰 규모이며 다원식(多院式)의 가람 배치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절터로서 주목된다. 2005년 법천사지가 사적 제466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 智光國師玄妙塔碑, 국보 제59호)는 지광 국사 해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085년에 세워진 4.5m 높이의 탑비로, 법천사지에 있다. 귀부(龜趺) 위에 탑신(塔身)을 세우고 이수(螭首)를 올린 모습으로, 용의 얼굴을 한 거북은 목을 세우고 앞을 보고 있다. 탑신의 양쪽에는 2마리의 용을 화려하고 정교하게 음각하였고, 네 귀퉁이가 들려진 이수에는 귀꽃을 달았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탑비로 평가된다.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 智光國師玄妙塔, 국보 제101호)은 지광 국사 해린의 사리탑으로 지광국사현묘탑비와 함께 법천사에 세워졌지만, 1910년 일본에 반출되었다가 1945년 8·15광복 이후 반환되어 경복궁 경내에 옮겨졌다. 부도탑의 기본형인 8각원당(八角圓堂)에서 벗어나 평면방형(平面方形)의 새로운 양식을 취하고 있다. 지대석(地臺石)이 매우 넓고 층층의 높이와 넓이에 변화를 주었다. 탑신에는 전후 면에 문비형(門扉形)과 좌우에 페르시아풍의 격자창을 조각하고 다시 영락(瓔珞)으로 장식하였다. 상륜부(相輪部)는 앙화·복발(覆鉢)·보개(寶蓋)·보주(寶珠)가 층층이 올려져 있다.

법천사 당간지주(法泉寺 幢竿支柱,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0호)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3.9m이다. 기둥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으며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고 있다. 기둥 사이에는 당간을 꽂아두기 위한 받침돌을 둥글게 다듬어 마련해 놓았다.

참고문헌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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