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종(南山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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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의 11개 불교 종파 가운데 하나로, 계율을 닦고 익히는 것을 중시한 종파.

개설

남산종(南山宗)은 계율종(戒律宗)이라고도 한다. 계율을 중시하는 종파로, 조선 태종대에 그 명칭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한국 불교사에서 계율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7세기 전반 신라의 자장(慈藏)에 의해서였다. 고려시대에는 오교양종(五敎兩宗) 가운데 오교 중 하나였으며, 계율업(戒律業)이라고 불렸다. 이후 조선시대 초기에는 남산종이라 하였는데, 태종대에 불교의 11개 종파를 7개로 축소할 때 총지종(摠持宗)과 합쳐져 총남종(摠南宗)이 되었다. 총남종은 세종대에 7개 종파를 다시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과 함께 선종에 포함되었다.

내용 및 변천

중국에서 율종(律宗)이 성립된 것은 당(唐)의 도선(道宣)으로부터 비롯된다. 도선이 종남산(終南山)에 주석하였고 『사분율(四分律)』을 중심으로 계율을 정립하였기 때문에 남산율종이라고도 한다. 신라의 자장은 중국에 유학을 가서 도선에게 직접 수학한 뒤 643년에 귀국하여 『보살계본(菩薩戒本)』을 설하고 그에 대한 주석을 썼다. 또한 통도사(通度寺)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고 수계(受戒) 의식을 정비하여 호법(護法)보살로 칭해졌다. 이로 인해 신라에서는 교단 체제가 확립되고 계율학이 발전하였다. 하지만 계율종이나 남산종이 종파로서 성립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고려시대의 경우에는 11세기 후반 대각(大覺) 국사(國師)의천(義天)과 관련된 기록에서 계율·법상(法相)·법성(法性)·원융(圓融)·열반(涅槃)의 오교가 등장하는데, 이를 오교로 보는 데는 이견도 있다. 계율종은 이후 고려말기까지 오교양종의 오교 중 하나로 존속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종 초기에 오교양종의 혁파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이때 조계종·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법사종(法事宗)·화엄종(華嚴宗)·도문종(道門宗)·자은종(慈恩宗)·중도종(中道宗)·신인종(神印宗)·시흥종(始興宗)·총지종·남산종 등 총 11개 종파가 거론되었다. 오교의 하나인 계율종은 조선초기에는 남산종으로 불렸다. 그 당시 이들 11개 종파에 소속된 242개 사찰에 대해서는 수조지(收租地)와 노비 보유를 인정하고 그 수를 지정해 주었는데, 남산종에 속한 사찰은 10개소였다(『태종실록』 6년 3월 27일).

1407년(태종 7)에는 11개 종파를 다시 7개로 축소, 통합하였다. 즉 천태소자종과 법사종을 천태종으로, 중도종과 신인종은 중신종(中神宗)으로 합쳤으며, 도문종은 화엄종에 포함시켰다. 조계종·자은종·시흥종은 그대로 유지하였으며, 남산종은 밀교 계통인 총지종과 합하여 총남종이라 하였다. 그와 더불어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자복사(資福寺) 88개를 새로운 명찰(名刹)로 대체하였는데, 총남종의 경우에는 강음의 천신사(天神寺), 임진의 창화사(昌和寺), 삼척의 삼화사(三和寺), 화순의 만연사(萬淵寺), 나주의 보광사(普光寺), 창평의 서봉사(瑞峰寺), 인제의 현고사(玄高寺), 계림의 천왕사(天王寺)가 새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이후 세종대인 1424년(세종 6)에 다시 불교 종파를 선교양종으로 통폐합하면서, 총남종은 조계종·천태종과 함께 선종에 포함되었다.

참고문헌

  • 「흥왕사대각국사묘지명(興王寺大覺國師墓誌銘)」
  • 권상로, 『조선불교사개설』, 불교시보사, 1939.
  • 김영수, 『조선불교사고』, 중앙불교전문학교, 1939.
  • 김영수, 『조선불교사』, 민속원, 2002.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김용태, 「조선전기 억불정책의 전개와 사원경제의 변화상」, 『조선시대사학보』 58, 2011.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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