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사(普光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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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88개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성주산에 있었던 절.

개설

보광사(普光寺)는 고려중기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절이다. 고려 충숙왕 때 원명 국사 충감(沖鑑)이 절을 중창했다. 조선 태종 때 자은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사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창건주와 창건 연혁은 전하지 않고 고려중기 이전에 창건된 절로 추정하고 있다. 보광선사비문(普光禪寺碑文)에 따르면 원명 국사 충감(沖鑑)이 1336년(고려 충숙왕 5) 보광사에 와서 절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보광사를 중창하고 입적한 원명 국사의 공덕을 기리고자 1358년(고려 공민왕 7) 제자들에 의해 대보광선사비(大普光禪寺碑, 高麗林州大普光禪寺重創碑)가 세워졌다. 당시 보광사는 500여 칸의 건물에 승려가 3,000명에 이르고, 절에서 쌀 씻은 물이 7㎞ 밖의 금강까지 흘러들 정도의 거찰이었다고 한다.

(2) 조선시대

1407년(태종 7) 12월, 임주(林州, 현 부여) 보광사가 자은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의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임주 보광사는 자은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의 안녕과 고을의 복을 빌기 위하여 지정한 사찰이었으므로, 당대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사되었고, 1750년(영조 26) 주지 능일(能一)이 마멸된 보광선사비를 고쳐 새겼다.

(3) 현대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는데, 1995년 10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되었다. 절터 주변에서 고려시대의 석등, 석탑의 몸체와 지붕 부분, 받침대 모양의 간석, 석조, 막새기와들이 출토되었다. 원래 절터에는 보광선사비가 있었으나 1963년 부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문화재

대보광선사비(大普光禪寺碑, 보물 제107호)는 보광사 중창 사실을 기록한 비로, 중창을 주도한 원명 국사 충감의 공적을 기리는 내용을 함께 담고 있으며, 원래 명칭은 고려임주대보광선사중창비(高麗林州大普光禪寺重創碑)이다. 따라서 비문 내용은 보광사 중창 사실과 원명 국사의 생애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광사지에 있었지만 1963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비의 총 높이는 약 2.6m이고 비신(碑身)만이 남아 있다. 비문은 2차에 걸쳐 새겨졌는데 앞면은 1358년(고려 공민왕 7) 건립 당시에 새겼고, 뒷면은 1750년(영조 26)에 추가하였다. 비석 뒷면의 추기(追記)에는 "임진왜란 때 절과 비각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기적비(紀蹟碑)도 알아볼 수 없도록 훼손되어 원명 국사의 유적을 찾을 수 없으므로 주지 석능일(釋能一)이 고쳐 새기니 비의 기록이 천년만에 거듭 새로워져 밝기가 어제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