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사(白巖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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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88개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 백암리에 있었던 절.

개설

백암사(白巖寺)는 대동사(大同寺) 또는 백엄사(伯嚴寺)라고도 하고, 946년(고려 정종 1) 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한다. 통일신라말에 양부(陽孚)가 중창하여 선종의 중심 사찰이 되었고, 1026년(고려 현종 17)에 중건하였다. 조선 태종 때 천태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었다. 이후 백암사의 연혁은 전하지 않아 폐사된 시기를 알 수 없다. 현재 백암사지(伯巖寺址)는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 백암리에 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삼국유사』에 창건과 고려시대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신라 때 백흔(伯欣)과 엄흔(嚴欣)이 살던 집을 희사하여 창건하고 백엄사(伯嚴寺)라 했다고 한다. 또는 신라 때 북택청(北宅廳) 터를 희사하여 창건했다고도 한다. 창건 후 백암사는 한때 폐허화되었지만, 906년(신라 효공왕 10)에 사목곡(沙木谷)의 양부가 중창하고 주지로 있으면서 선종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 통일신라말 희양산문(曦陽山門)의 정진 대사 긍양(兢讓)이 스승 양부의 뜻을 이어 10년 동안 백암사에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고려시대인 1026년(고려 현종 17)에 중건하였고, 1065년(고려 문종 19) 11월 수립(秀立)이 주지로 부임하여 절의 규율 「원중상규10조(院中常規十條)」를 정하고 5층석탑을 세워 진신사리 42과(果)를 봉안하고 사재로 보(寶)를 세워 개창조를 위해 공양하는 등의 내용을 기약하였다.

(2) 조선시대

조선시대인 1407년(태종 7) 12월, 초계(草溪) 백암사가 천태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의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초계 백암사는 천태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의 안녕과 왕실의 복을 빌기 위해 지정하거나 건립한 사찰이었다. 통일신라말에 창건되어 고려시대를 거쳐 선종의 중심 사찰로 발전한 백암사가 조선초에도 지방의 명찰(名刹)이었음을 알 수 있고, 그 소속이 천태종으로 바뀐 점도 주목된다. 이후 백암사의 연혁은 전하지 않아 폐사된 시기도 알 수 없다.

(3) 현대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2006년 경남문화재연구원은 백암사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한 1차 발굴 조사를 시행했다. 조사를 통해 금동불입상과 청동제 사리구, 유리제 사리병편, 금박편, 막새 등 와류와 청자편 등이 발굴되었다. 또 건물의 구조와 시대를 추정할 수 있는 초석과 3동의 건물지, 기단석열, 배수로 등이 드러났다.

문화재

폐사된 백암사의 절터인 백암사지(伯巖寺址) 혹은 대동사지(大同寺址)에는 대동사지석조여래좌상(大同寺址石造如來坐像,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호)과 백암리석등(伯巖里石燈, 보물 제381호)이 있다.

석조여래좌상은 불신 높이 150㎝, 좌대 높이 60㎝로 8각 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얼굴 부분의 마멸이 심하지만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불상 일부는 시멘트로 보수한 상태이고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암리석등은 기본형인 8각 석등으로 상륜부는 없어졌고 나머지 다른 부재는 거의 완전하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8세기 후반의 석등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등이 세워져 있는 곳은 백암사지라고 전해오나 분명하지 않고, 석등이 무너져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한 것으로서 원래의 위치는 알 수 없다고도 한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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