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노비(寺社奴婢)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사찰에 소속되었다가 조선초기에 속공(屬公)되어 각사(各司)·각궁(各宮) 등에 분속(分屬)된 노비.

내용

사사노비(寺社奴婢)는 크고 작은 사찰에 소속된 노비로서, 고려시대의 제도로서 조선에 남겨진 것 중 하나였다.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내세우고 숭유억불 정책을 사용했으므로 이를 위해 사원 혁파를 비롯한 구체적 조처들을 내놓았다. 그 중 하나가 사사노비의 혁파였다. 사사노비의 혁파 논의는 태조대부터 대두되었다. 그러나 숭유(崇儒)의 국시에도 불구하고 태조는 숭불(崇佛) 경향이 있는 군주였으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태종대에 와서 각종 정책이 강력히 추진되는 가운데 사사노비의 혁파도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이는 억불 정책과 상응하는 태종의 공노비 확보책의 하나로서 추진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전국의 사원전(寺院田)과 사사노비를 모두 관(官)의 소유로 돌려, 사원전의 전조(田租)와 사사노비의 신공(身貢)을 국가가 수취하게 하였다. 또 사헌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혁거사사노비(革去寺社奴婢)를 승려들이 모점(冒占)하여 사사로이 주고받지 못하도록 이를 철저히 금하였다.

처음에 사사노비를 혁파할 때 한 일은 존속시킬 사원과, 이 사원에 지급할 사원전과 사사노비의 수를 정하는 것이었다. 이는 혁파 기준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기준이 만들어진 후 나머지 사원전과 사사노비는 모두 속공하였다. 그리고 혁파된 사사노비는 1406년(태종 6) 4월 의정부의 계청으로 중앙의 각사(各司)에 분속되었다. 대부분을 전농시(典農寺)에 소속시켰고, 군기감·내자시·내섬시·예빈시 등에도 분속시켰다.

하지만 각사에 분속한 결과 노비의 가족이 각각 흩어져 유망(流亡)하는 노비가 속출하였다. 이에 이듬해인 1407년(태종 7) 사사노비의 신공 식례(式例)를 만들었다. 내용은 군기감에 정속(定屬)한 4,000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혁거한 사사노비는 관청에 분속하지 말고 현재 살고 있는 곳에 모여 살게 하며, 둔전 경작자와 신공 납부자로 나누어 거주하는 주군(州郡)에서 관리하게 하는 것이었다. 즉 국가 기관에 입역시키지 않고 둔전 경작에 따른 소출의 일정량 또는 신공을 거주지에 납부하도록 한 것이다.

한편 패망(敗亡)한 사사노비를 역사(役使)하거나, 혁거한 사사노비를 누락시켜 보고하지 않으면 진고(陳告)를 허락하여 속공하였다. 사사노비의 혁파와 속공은 공노비 추쇄 정책과 더불어 공노비 수를 늘리려는 태종의 중요한 노비 정책이 되었다. 그러나 사사노비의 혁파 등 태종의 공노비 정책은 과중한 경제적 부담으로 인해 도망 노비가 속출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 왕조는 공노비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면서 공노비제를 유지·개선해 왔다.

용례

1401년(태종 1)에 올린 사사노비의 혁파를 주장한 문하부(門下府) 낭사(郎舍)의 상소는, 사사노비를 속공하여 승니(僧尼)들의 쟁리지심(爭利之心)을 막자고 하였다(『태종실록』 1년 1월 14일). 공노비 확보라는 목표는 드러내지 않고, 승려들을 이익을 다투는 마음을 가진 세속적인 인물로 묘사하여 억불(抑佛)을 강조하고 있다. 이 밖에도 사사(寺社)의 토전(土田)과 노비의 속공 이유를 산문(山門)에 도승(道僧)만 남기기 위한 것으로 표현한 사례도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이지우, 「조선 초기 노비 정책의 추이에 관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 임영정, 「선초 공천(公賤)에 대한 연구」, 『사학연구』23, 1973.
  • 지승종, 「조선 전기 공노비 제도의 구조와 변화」, 『한국학보』32, 198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