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문(朴永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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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13년(중종 8) = ?]. 조선 전기 성종~중종 때 활동한 무신. 공조 판서를 지냈다.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안주목사(安州牧使)박휘(朴輝)이며, 어머니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영의정(領議政)구치관(具致寬)의 딸이다. 영의정박원종(朴元宗)과는 어릴 때 친구이고 동년(同年) 동훈(同勳)이다.

성종~중종 시대 활동

그는 문무를 겸비하여 처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나, 뒤에 무과(武科)에 응시하여 급제, 무관으로 진출하였다. 1419년(성종 22) 7월에 후원(後苑)에서 무신(武臣)의 활쏘기를 3일 동안 시험하였는데, 그는 허감(許瑊)과 함께 수위(首位)를 차지했으므로 별조궁(別造弓) 1장(張)과 대전(大箭) 1부(部)를 하사받았다.

1503년(연산군 9) 2월에는 형조 정랑(正郞)으로 있었다. 연산군 말년에 박원종 · 성희안(成希顔) · 유순정(柳順汀) 등이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옹립하려고 할 때, 그는 군기시(軍器寺)첨정(僉正)으로서 군자시(軍資寺) 부정(副正)신윤무(辛允武), 사복시(司僕寺)첨정(僉正)홍경주(洪景舟) 등과 더불어 군대 동원의 책임을 맡아 거사를 성사시켰다. 그 공으로 1506년(중종 1) 9월에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훈(策勳)되고, 그 해 같은 달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졌으며, 같은 달 하순에 호조 참판(參判)이 되었다. 1507년(중종 2년)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官) · 평시서(平市署)제조(提調)가 되었으나, 대간(臺諫)의 탄핵(彈劾)을 받아 체직되어 봉조하(奉朝賀)로 있었다. 1508년(중종 3) 12월에 다시 함양군에 봉해졌다. 이듬해에 삼포(三浦)에서 왜변이 일어나자 도원수(都元帥)유순정(柳順汀)을 따라 왜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1509년(중종 4) 11월에 공조 판서(判書)가 되었다. 그 뒤 다시 대간의 계속적인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그러자 항시 자신을 배척하는 사류(士類)들에게 원한을 품고 그의 동지였던 정국공신의 한 사람인 영천군(寧川君)신윤무의 집에 드나들면서 조정을 비방하는 말을 많이 하였다. 마침내 1513년(중종 8) 10월 신윤무 등과 무인들을 규합하여 성종의 열셋째 아들인 영산군(寧山君)이전(李恮)을 추대하고 역모(逆謀)를 모의하려다가, 의정부의 노비인 정막개(鄭莫介)의 고변으로 발각되어 그 해 10월 24일 처형되었다. 같은 달 28일에는 책훈된 정국공신 1등이 삭제되었다.(『중종실록(中宗實錄)』 중종 8년 10월 24일) 실록에는 그의 성품이 흉악하고 욕심이 많으며 방자하여 꺼리는 일이 없었다고 하였다.[『중종실록』중종 4년 12월 17일, 중종 8년 10월 25일]

후손

부인은 황씨(黃氏)인데, 자녀는 5남을 낳았다. 1남은 박온(朴溫)이고, 2남은 박양(朴良)이며, 3남은 박공(朴恭)이고, 4남은 박검(朴儉)이며, 5남은 박신(朴信)이다. 아버지 박영문이 성종의 열셋째 아들인 영산군이전을 추대하는 역모(逆謀)를 모의하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되면서 그의 네 아들이 모두 교형(絞刑)에 처해졌고, 막내아들 박신(朴信)만 살아남아 대를 이었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음애집(陰崖集)』
  • 『충재집(冲齋集)』
  • 「성화 16년 경자 3월 초3일 사마방목(成化十六年庚子三月初三日司馬榜目)」